[이지영의 클래식 노트]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매년 3월 경남 통영국제음악제를 찾는다. 처음 음악제가 열린 2002년에는 윤이상과 현대음악을 듣기 위해 떠난 여정이 꽤 멀게 느껴졌다. 몇 해의 시간이 쌓이는 동안 낯선 음악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바뀌었고 음식과 자연, 한산도를 둘러싼 역사 이야기에 애정이 깊어졌다.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백석, 정지용 등 통영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한 적 있는 문화예술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민들을 만나는 일도 즐겁다.
축제는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유기체와 같다. 이야깃거리가 되는 씨앗에 물을 주고 시간을 들여 정성을 쏟으면 도시를 찾는 사람들의 자발적 이동이 이뤄지면서 자생력을 갖게 된다. 문제는 어떤 요소를 어떻게 살리고 얼마나 오래도록 잘 지속하느냐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축제로는 도시는 기억되지 못한다.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축제는 뽑히기 쉽다. 큰 예산을 들여 유명인을 섭외할 순 있지만 같은 형태의 축제가 장소만 바꿔 다른 곳에서 열리면 방문객은 철새처럼 함께 이동하게 된다.
통영처럼 처음부터 할 얘기가 많았던 도시도 있지만, 같은 해에 출발한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지역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작한 콘텐츠가 성공한 사례다. 흥미로운 것은 통영과 대구가 선택한 축제의 재료다. 통영은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가장 낯선, 동시대 작곡가의 초연 무대를 중심으로 축제를 꾸렸다. 대구는 가장 많은 예산과 오랜 준비 기간을 필요로 하는 오페라를 제작해 축제로 만들었다. 그렇게 23년이 지난 지금, 통영과 대구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서도 쉽게 이식할 수 없는 고유한 축제를 갖게 됐다. 꾸준한 방문자 유입은 지역 사회 산업을 움직인다. 축제와 시민이 함께 성장하는 동안 도시는 더 특별해진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시작해 올해 4회째인 경북 포항국제음악제는 개막 공연부터 화제였다. 지난여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데뷔 무대를 가진 지휘자 윤한결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심포니 수석 플루티스트 김유빈의 협연을 보기 위해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섬세함과 완결성의 극치를 보여준 포항페스티벌오케스트라(악장 토비아스 펠트만)의 연주는 호평 일색이었다. 포항 출신 아티스트의 무대와 포항 내 명소에서 열린 '찾아가는 음악회' 반응도 뜨거웠고, 어린이들이 극장 로비에서 합동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한 무대도 보기 좋았다.
공업도시 포항은 국내 3대 서핑 명소로도 유명하다. 국제음악제에 대한 좋은 반응이 더해져 이미지 다각화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그런데 좋은 축제가 생기면 동시에 불안해진다. 성공 사례를 보고 다른 도시가 비슷한 형태의 축제를 만들거나, 축제 성과와 손익을 따진 끝에 예산이 감축되거나, 지방자치단체장의 교체로 축제 자체가 폐지되기도 한다.
도시 전체가 고심한 스웨덴 '웨이 아웃 웨스트 음악제'
스웨덴 예테보리의 '웨이 아웃 웨스트 음악제'에 다녀온 적이 있다. 2007년부터 열린 축제는 해마다 세계적 팝스타가 찾고, 수만 명의 관객이 몰린다. 미국과 영국의 전통적인 유명 축제들 사이에서도 호평받은 이 축제의 장점은 확실하다. 관객이 오래 머물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곳이 되도록 시 전체가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유명 연주자의 무대는 어디에서든 볼 수 있지만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한 휴대폰 충전 부스, 일회용 생수병 대신 물병에 물을 담아 마실 수 있도록 곳곳에 세워 둔 수도꼭지, 적정 개수의 화장실과 오래된 우체국을 개조한 멋진 디자인 호텔까지. 쓰레기도 없고 자연을 배려한 좋은 경험은 그 축제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윤한결은 포항국제음악제 개막 공연 지휘를 맡은 소감을 밝히면서 "유럽에 살면서 참가했던 페스티벌들은 몇십 년, 몇백 년 된 것들이었다. 한국에 새로 생긴 음악제에 지휘자로서 처음 연주를 맡게 된 점이 좋았다"고 했다. 도시를 빛내는 근사한 축제들이 많아져야겠고 축제가 근사해지려면 도시 전체가 마음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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