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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도 결투했다!

입력
2023.11.12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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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지
김선지작가
주세페 데 리베라, '여자들의 결투', 1636년,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주세페 데 리베라, '여자들의 결투', 1636년,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중세 시대의 이미지 중 하나는 은빛 갑옷을 입고 긴 창을 든 늠름한 기사가 마상 시합(joust)을 벌이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마음을 얻는 장면이다. 그런데 말에 탄 기사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1552년, 나폴리 귀족 여성인 이사벨라 데 카라치와 디암브라 데 포티넬라 사이에 벌어진 결투다.

그림은 바로 이 드라마틱한 사건을 묘사한다.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화가인 주세페 데 리베라(Jusepe De Ribera)가 그린 '여자들의 결투(Duelo de Mujeres)'다. 이사벨라와 디암브라는 파비오 데 제레솔라라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웠던 전설적인 에피소드의 여주인공들이다. 오른쪽 여성이 검을 한껏 치켜들고, 부상을 입은 채 땅바닥에 쓰러진 상대를 제압하고 있다. 주변에는 도끼창을 든 군인과 민간인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거칠고 역동적인 전투 장면 속에서도 인물들의 헤어스타일과 드레스는 고전적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묘사돼 한층 극적인 효과를 창출한다. 밝은 오렌지, 우아한 연보라 톤의 풍부한 드레스 색상에서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의 영향이 엿보인다.

파비오는 매우 잘생긴 신사로, 16세기 나폴리 사교계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이사벨라와 디암브라 역시 파비오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본래 친한 친구 사이였던 두 여성은 그가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다며 말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한 여자가 결투를 신청했다. 엿새 후, 그들은 마을의 들판에서 검, 창, 철퇴, 방패, 그리고 갑옷을 입힌 말 등 완벽한 전투 장비를 갖추고 결투를 하게 된다. 이 일은 나폴리 도시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결투 당일 스페인 총독을 포함해 많은 나폴리 궁정 사람들이 이사벨라와 디암브라의 결투를 보려고 속속 모여들었다.

벨벳 망토를 걸친 말을 탄 이사벨라는 가문의 문장(紋章)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투구를 쓰고 푸른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디암브라는 황금뱀 문장이 있는 투구와 초록색 갑옷을 착용했다. 그들의 말은 보통 말이 아니라 데스트리어(destrier)였다. 데스트리어는 가장 높은 등급의 중세 군마로, 기사들이 전쟁이나 마상 시합을 할 때 탔던 말이다. 신호나팔을 불자 이들은 창을 들고 맹렬하게 상대방을 향해 돌진했고 순식간에 창이 부러졌다. 창을 잃은 두 숙녀는 이번엔 철퇴를 휘두르며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결국 디암브라가 철퇴로 이사벨라의 방패를 부수었고 그 여파로 말이 쓰러졌다. 데스트리어에서 내려 낙마한 이사벨라에게 다가간 디암브라는 파비오가 그녀의 것임을 인정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때, 별안간 검을 움켜쥔 이사벨라가 달려들어 디암브라를 쓰러뜨리고 투구 끈을 끊어버렸다. 디암브라는 패배를 받아들였고, 이사벨라는 인간 전리품 파비오를 쟁취했다. 구경거리를 쫓아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이 예상 외의 역전 드라마에 얼마나 열광했을지 짐작이 가리라! 이 놀라운 결투 스캔들은 당대 전 유럽의 궁정에 들불처럼 퍼졌다. 이야기는 이후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80여 년 후엔, 주세페 데 리베라의 그림으로 기록되었다.

인간사회의 구성원들 간에는 끊임없는 분쟁이 생기기 마련이다.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결투는 고대 세계에서 19세기까지 공공연하게 존재했다. 국가는 엄벌로 다스리려 했지만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고, 결투자들은 종종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생명까지 잃었다. 살인을 해도 대부분 법적으로 처벌되지 않고 넘어갔다.

결투는 보통 남자들의 영역으로 여겨지지만, 남자와 여자 간,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있었다. 사실 여자들의 결투는 훨씬 더 피비린내 나고 잔혹했다. 연적이거나, 기분 나쁜 곁눈질에 기분이 상하거나,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것이 거슬리거나 하는 사소한 것이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남성 간의 결투는 10건 중 4건이 죽음을 부른 반면, 여성 간의 대결은 10번 중 8번이 살인으로 끝났다고 한다.

에밀 앙투안 바야르, '결투, 그리고 화해' 1891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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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전설적인 여성 간 결투는 1624년 가을, 당대의 바람둥이 미남자 리슐리외 공작을 사이에 두고 파리의 블로뉴 숲에서 벌어진 네슬레 후작부인과 폴리냑 백작부인의 결투였다. 19세기엔 오스트리아 귀족 여성인 폴린 메테르니히 공주와 아나스타샤 킬만세그 백작부인이 토플리스(Topless) 결투를 벌여 장안의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인간의 약점을 꿰뚫어 본 셰익스피어는 "결투는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관습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에 동의할 것이다. 하찮은 시비로 인해 칼과 총이 동원된 치명적 결투를 한 옛사람들이 우스꽝스럽고 한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과거 결투 문화의 흔적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 경기장과 입장료를 내는 관객이 추가되고 살의 대신 스포츠 경쟁 정신으로 대체되긴 했지만, 결투의 행태는 현재의 프로 격투기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총잡이들이 서로 마주 보고 서서 누구 더 빨리 총을 빼서 쏘느냐로 승자를 정하는 서부극의 통속적인 결투 클리셰(cliché)는 또 어떤가. 도로에서 가끔 일어나는 자동차 보복 질주도 자존심을 건 일종의 결투다.

현대사회에도 어떤 형태로든 결투를 시도하는 사람들, 결투하라고 남을 충동질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최근 테슬라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SNS를 통해 농담 반 진담 반 브라질 격투기인 주짓수 시합을 하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현피 여부가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그들의 결투를 한껏 기대하는 우리 자신을 보라. 결투 유전자는 우리의 정신에서 멸종되지 않았다. 역사에서 봤듯이, 남성과 여성도 가리지 않는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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