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 엥겔바트의 마우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41년 전시 행정명령으로 세운 ‘과학연구개발국’의 설립 취지는 첨단 과학의 군사화였고 개발 국장은 오직 한 사람 대통령에게만 경과를 보고했다. 그 국장이 매사추세츠공대(MIT) 학장을 지낸 컴퓨터공학자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 1890~1974)다.
하이퍼텍스트의 원류인 마이크로필름 기반 다중기억 수정보강장치 ‘미멕스(Memex)’를 개발한 그는 1945년 7월 ‘애틀랜틱’에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As We May Think)’란 에세이를 기고했다. “개인이 자신의 모든 책과 문서 통신기록을 저장하고 기계화해서 빠르고 유연하게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미래의 어떤 수단을 생각해 보자.” 그는 과학이 파괴가 아닌 평화를 위해 쓰이기를 기대하며, 미멕스가 집단지성의 창고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 글에 고무된 컴퓨터 공학도 중 한 명이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 1925~2003)였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전시 해군 레이더기술병으로 복무한 그는 UC버클리를 거쳐 스탠퍼드연구소(SRI)에서 부시가 꿈꾼 ‘집단지성’, 즉 인류의 지능 증강에 기여할 만한 다양한 컴퓨터 기반 아이디어와 장치들을 개발했다.
1968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그는 현대 컴퓨터 기반 기술의 모든 아이디어와 영감이 거기서 비롯됐다는 의미로 ‘모든 시연회의 어머니(the mother of all demos)’라 부르는 시연회를 열었다. 원격화상회의와 하이퍼텍스트 워드프로세싱과 하이퍼미디어, 다수가 동시에 한 문서를 공유하며 편집하는 기술 등등. 제록스 파크(PARC) 설립자 앨런 케이는 “그가 마치 홍해를 가르는 모세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새로운 컴퓨터 인터페이스 장비를 처음 선뵌 것도 그 무대였다. 1970년 11월 17일 특허를 받은, 훗날 마우스라 불리게 된 그 장비는 PC가 대중화한 8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실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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