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29표.
2030 엑스포 유치전에 뛰어든 한국 부산이 거둔 초라한 성적표입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는 투표 참가국 165개국 중 119개국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숫자 비교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1차 투표만으로 허무하게 상황이 종료됐죠.
대통령실은 막판 표심을 얻기 위해 예비비까지 끌어다가 역대 최고 수준인 578억 원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면서 민관 총력전으로 “49 대 51”까지 쫓아왔다는 장밋빛 전망을 내놨죠. 하지만 결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참담한 정보 실패입니다. 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일까요.
엑스포 막판 정보전 나서도 모자랄 판에 단행된 수뇌부 교체
“엑스포 유치전 표결 동향이 어떻게 되는지 해외정보 수집에 집중해야 하는데 인사싸움이나 벌이니 이 꼴이 나지.”
2030 엑스포 유치전 결과를 지켜본 한 전직 국가정보원 인사는 이같이 푸념했습니다.
부산 엑스포 표결 직전, 대통령실은 국정원장과 1차장, 2차장을 전격 경질했습니다. 수뇌부 3인을 동시에 날린 겁니다. 해외 최일선에서 엑스포 유치 총력전을 뒷받침해야 할 정보조직의 손발을 묶은 셈입니다.
‘정보’와 ‘정책’은 다릅니다. 표심을 얻기 위한 외교를 펼치는 게 정책의 영역이라면 상대방 국가의 동향과 투표에 나설 대표자가 누구인지 등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는 건 정보에서 맡을 부분입니다.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외교부와 국정원은 두 영역의 업무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외교부가 상대적으로 정책에 무게를 뒀다면, 국정원은 정보에 무게를 둔 조직입니다.
막판까지 첩보전을 방불케 할 정보싸움을 벌여도 시원찮은 판에 국정원이 내부 문제에 시달려 인적 교체라는 초강수를 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래 업무보다는 알력 다툼만 벌이고, 이를 외부에 알리는 것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한 소식통은 “정권 초 외부에서 국정원장과 기조실장을 발탁하다 보니 처음엔 조직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주도권을 행사하려 한 세력끼리 충돌했고, 이번에는 원장과 해외정보 수집을 책임져야 하는 1차장 간 엇박자가 부각됐다”고 말했습니다.
윗선에서 권력 투쟁이 한창인데 실무진이 각자의 업무에 혼신의 노력을 다할 수 있었을까요. 복수의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외교부와 국정원 모두 엑스포 전망을 낙관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대통령실과 총리실의 들뜬 분위기에 우려 섞인 말들이 나오고 있었죠. 그러나 “적극적으로 국면을 전환할 생각은 안 하고 비관론부터 펼치고 본다”는 질타에 점점 ‘희망 시나리오’가 보고에 담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재인 정부 때는 '북한 정보의 정치화'가 문제였다면 윤석열 정부에서는 '해외 정보의 정치화'가 사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20년간 반복된 인사파동…"휴민트가 무너졌다"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살펴보면 정보의 정치화는 업무 고유의 전문성이 아닌, 정권의 눈치만 보는 조직 문화가 만연하는 상황에서 기승을 부렸습니다.
정치화의 끝엔 정보 실패가 있습니다. 파벌 싸움에도 정보 실패가 있습니다. 반복적인 인사 교체로 ‘전문가’를 육성할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시기를 놓고도 국정원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1차장 산하 해외정보 수집 실무진과 해외 파견 인력이 교체됐습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반복된 인사 파동이 유례없는 형태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1998년 정권 교체로 인한 인사 물갈이를 피하기 위해 공개된 ‘이대성 문건 유출 사건’은 국정원의 해외 정보 역량이 붕괴하는 시발점이었습니다.
안기부 전 해외조사실장이 유출한 극비문건으로 이른바 ‘흑금성 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공개된 문건에는 중국 내 국정원의 휴민트(HUMINT·인적 정보)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한 전직 국정원 인사는 “당시 공개된 문건 때문에 중국 내 휴민트가 무너졌어요. 그 이후 복구가 안 되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지난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당시 중국은 진작부터 한중 정상회담을 고려하지 않아 한국 담당 간부나 통역을 대동하지 않았지만, 국정원은 이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대통령실은 국내 언론을 상대로 '막판까지 한중 정상회담을 조율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지요.
무너진 내부 기강과 정치권의 '국익' 놀이…국가정보력 약화 초래
문재인 정부 때 일본의 휴민트가 무너졌다면,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문재인 정부 때 구축한 대북 휴민트가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 정부는 일본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개입과 수출규제 등의 동향을 조기에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윤 정부에서는 휴민트가 부실하다 보니 공개출처 정보인 오신트(OSINT)나 과학 기술을 동원한 테킨트(TECHINT) 등 다른 수단에 의존을 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려옵니다. 제대로 된 해외 정보원을 양성하려면 10년이 걸리는데 지난 20년 사이 이른바 ‘주변 4강’과 북한 관련한 정보 수집 노하우가 모두 무너져버렸으니까요.
정권 교체를 이룬 인사들이 기자들을 만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국익을 위한 기사를 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국익’은 늘 외교·정보 전문가들의 정치화를 전제합니다. 그 결과, 정보 실패는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국정원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조직이 아닌 ‘양지에서 일하지만 음지를 지향하는’ 조직이 돼버렸습니다.
이번 정보 실패는 엑스포 유치 실패로만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국정원의 전문성 복구와 '국익 개념' 정립, 이에 따른 조직 개혁이 시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예견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또 다른 참사를 맞닥뜨릴지 모릅니다. 엑스포 실패는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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