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인도, 영국, 일본을 거쳐 한국까지...카레의 여정
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흥미진진한 역사 속 식사 이야기를 통해 ‘식’의 역사(食史)를 새로 씁니다.
1920년대 초반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외할머니는 '신여성'이었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양장 기술을 습득해 월남 후 실질적인 가장 노릇마저 했다. 그런 외할머니가 잘했던 음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옛 표현을 그대로 옮겨 ‘라이스 카레’였다. 1920년대에 그것도 만주에서 태어난 한국 여성이 카레를 끓여 손자에게 먹였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이색적이라 신비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풍성한 향신료 속의 감자며 당근은 어린이의 입맛에 놀랍게도 딱 들어맞았다. 그렇게 나는 카레와 친해졌다.
‘라이스 카레’를 마지막으로 맛본 지 40년 가까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카레를 즐긴다. 물론 직접 만들어 먹는다. 끓일 때마다 카레가 200여 년 동안 겪은 여정에 감탄하곤 한다. 인도의 카레가 영국을 거쳐 일본에서 만개하고 한국까지 건너왔다. 이렇게 카레가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어 일상의 음식으로 자리 잡은 데는 나름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카레는 심지어 김치와도 매우 잘 어울렸다. 저마다의 음식 조합 변주로 각국에서 생명력을 키운 카레의 여정을 살펴보자.
루의 활용, 영국 카레의 혁명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듯 카레는 원래 '커리'(curry)였고 인도가 고향이다.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의 온갖 카레가 상당히 대중화된 오늘날까지도 아직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게 있다. 카레는 정형화된 음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타밀어로 ‘수프’ 혹은 ‘소스’라는 뜻의 '커리'는 향신료의 조합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맛과 향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국가, 지역, 심지어 가정마다 향신료의 조합이 다르다. 인도와 태국의 카레가 다른 배경이다.
'커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카레로 정형화되기 시작한 계기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다. 영국은 17세기 동인도회사를 내세워 인도를 침탈했다. 이를 통해 18세기 말 백후추와 회향, 정향, 쿠민, 고수, 고춧가루 등으로 배합된 카레의 일종인 가람 마살라(garam masala)가 영국으로 유입됐다. 그 결과 1747년 해나 글라스의 저서 ‘쉽고 소박한 요리’(The Art of Cookery Made Plain and Easy)에 처음으로 카레 레시피가 등장한다. 1년 뒤엔 영국의 식품 기업 크로스앤드블랙웰(C&B)이 인스턴트 커리 가루를 최초로 출시했다.
영국에선 1810년 최초의 카레 전문점이 문을 열었다. 점차 자리를 잡아 나가던 카레는 해군의 음식으로 탈바꿈을 시작한다. 영국의 침탈에 선봉장 노릇을 했던 해군은 카레를 쌀쌀한 바다의 환경에 맞는 음식으로 조리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오늘날 일본 및 한국식 카레로 익숙한 카레의 스튜화였다.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카레는 수프나 소스라는 어원에 걸맞게 묽은 편이다. 하지만 영국 해군은 카레가 바다의 쌀쌀함에 견딜 수 있도록 걸쭉하게 만들었다. 버터나 식용유 등 지방에 밀가루를 볶아 쑨 풀인 루(Roux)를 활용하는 게 변화의 핵심이었다. 루는 서양 스튜의 기본 재료로 소스의 걸쭉함과 풍미를 두텁게 해주는 게 특징이다.
감자를 품다, 일본 카레의 변화
루의 힘을 빌려 본격적으로 스튜로 탈바꿈한 카레는 빵과 함께 먹는 음식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까지 상륙한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1889) 시기였는데 카레 유입의 배경을 두고 여러 설들이 난무한다. 좌초된 영국 군함에서 뭍으로 올라와 목숨을 건진 장병 가운데 한 명이 카레 양념이 담긴 병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카레가 일본으로 유입되었다는 게 대표적이다. 이 이야기는 생존자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배에서 가지고 나온 물품이 카레 향신료 단 한 가지였다는 식으로 극화돼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온다.
카레는 일본에서도 해군의 음식이 될 팔자를 피할 수 없었다.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 혼슈의 항구도시 요코스카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 또한 카레를 이상적인 군 급식 음식으로 여겼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조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기와 채소 또한 함께 익힐 수 있어 영양의 균형도 맞을 거라 본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밥과 잘 어우러지도록 밀가루를 더해 걸쭉하게 끓인 카레는 곧바로 해군 장병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해군들의 입소문을 통해 카레의 인기는 일본 전역으로 번졌다.
입소문을 타던 카레는 감자를 계기로 한 차례 큰 변화를 겪는다. 1877년 일본에 쌀이 부족해지자 카레에 쌀 대신 감자를 넣자는 제안이 힘을 얻었다. 일본의 농학과 과학을 현대화시킨 홋카이도대학의 미국인 농학자 윌리엄 S. 클락(1826~1886)이 그 아이디어를 냈다. 구황작물인 감자가 카레의 주재료로 일본과 한국에서 자리 잡은 배경이다.
감자까지 품은 카레는 일본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한참 동안 음식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향신료의 배합과 걸쭉해지기 위한 루의 조리 모두 가정에서 다루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 걸림돌 중 하나가 1923년 사라진다. '카레의 명가'로 유명한 일본 에스비(S&B) 식품이 배합 카레 양념을 출시하면서다. 야마자키 미네지로 S&B 창업자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전파된 가람 마살라를 바탕으로 더 많은 향신료를 더해 이 제품을 시장에 내놨다.
카레 양념이 출시되고 3년 뒤 루 또한 인스턴트 제품으로 출시되면서 카레의 대중화는 가속 페달을 밟는다. 1926년 일본 우라카미쇼텐(현 하우스식품)은 ‘홈 카레’라는 품명으로 루가 일체화된 과립형 카레를 출시했다. 더 나아가 S&B는 1956년 많은 이들에게 카레의 전형으로 각인된 '덩어리형 인스턴트 제품'을 내놓는다. 이 제품을 계기로 가정식으로서 카레의 입지가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워 바로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 완제품은 1968년 일본 오츠카 식품이 ‘본 커리’라는 품명으로 출시했다. 이런 '진화'를 거쳐 오늘날 카레는 일본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는 음식 가운데 하나로 성장한다. 스시 대신 카레를 ‘가장 일본적인 음식’이라 꼽는 사람도 많다.
'미국산 안 맞아' 한국 카레의 태동
한국에서 카레를 처음으로 조리해 먹은 인물은 1884년쯤 조선을 탐험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으로 추정된다. 그는 카레 가루와 밀가루 등을 챙겨 북한강 유역을 탐험하면서 카레를 해 먹었다. 낯선 나라의 오지를 돌다 지친 그가 카레를 해먹던 소회를 책('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994)에 기록한 내용은 이랬다. "별다른 외국 음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여행자에게 카레 국물에 버무린 꿩고기 요리(...) 그 훌륭하고 따스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10시간이 넘는 추운 여행 후에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카레는 1925년경 한국에 유입됐다. 1930년대엔 신문에 제법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의 카레에 대한 표현은 나의 외할머니가 썼던 것처럼 ‘라이스 카레’였고 조리법이나 먹는 시기 등에 대해 주로 다뤄졌다. 인스턴트 카레가 보급되지 않아 "카레 가루에 별도로 밀가루를 넣으라"거나 "작은 불에 오래 끓여야 제맛이 나니 채소를 익히고 카레를 더한 뒤 한참 더 끓이라"는 내용이었다. 매우니 겨울철에 먹지만 원산지인 인도에선 여름에 먹는다는 유래도 소개됐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카레는 일본 대신 미국에서 수입됐다. 다만 미국산은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결국 1963년 9월 제일식품화성주식회사가 한국 최초의 즉석 카레인 ‘스타 카레분’을 출시했다. 5년 뒤인 1968년엔 조흥화학 식품사업부에서 ‘오뚜기 분말 카레’도 생산했다. 오늘날의 '오뚜기 카레'가 이렇게 시작됐다. 1981년엔 레토르트 제품 ‘3분 카레’가 출시돼 오늘날 대중화된 카레의 초석이 다져졌다.
카레의 상업적 입지는 옛날에 비해 좁아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외식으로 인기였던 카레는 1990년대 이후 가정식으로 상당 부분 흡수돼 시장 성장은 둔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일본식 카레 프랜차이즈 업체와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전역의 카레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 생겨나면서 선택지는 다시 느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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