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10번째 영화 '거미집'을 뒤늦게, 그리고 재미있게 보았다. 1970년대 한국 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로, 주인공은 중견 감독이다. 그는 데뷔작 성공 후 이어진 상업적인 작품들에 대한 세간의 악평에 시달리던 중 이번에 찍은 영화의 결말 부분을 다시 찍고 싶어 한다. 제한된 제작 여건과 당국으로부터의 사전 검열이 엄격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실현이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김 감독은 결말 부분만 다시 찍으면 진정한 걸작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촬영을 감행한다.
영화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감독과 배우, 제작자, 문공부 검열국장 등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벌어지는 소동극으로 진행된다. 재촬영에 들어간 그날, 이내 현실의 벽에 다시 부딪힌 감독은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며 망연자실해진다. 이때 주인공의 과거 영화 스승이었던 신상호 감독의 환영이 나타난다. 신 감독은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었던 사람이다. 환영은 다음과 같이 멋진 말로 격려해 준다.
"재능이라는 게 뭐 별거 있나?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지."
영화를 보다가, 내가 하는 수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간단한 수술이건 복잡한 수술이건, 수술이 끝났을 때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느낌이 든 적은 거의 없었다. 근치를 위한 광범위 절제를 한 경우에는 환자의 기능 보존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만 잘랐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초기병변으로 판단해 제한적으로 부분 절제를 하고 검체를 살펴보면 절제 범위가 불충분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집도의를 믿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생각하면, '걸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손익분기점'은 넘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수술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최근 수술받은 분 중에 가장 잘 되셨네요." 회진을 돌면서 환자들에게 흔히 건네는 말이다. 해롭지 않은 뻔한 거짓말이면서 틀림없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수술을 거듭할수록 내 수술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걸작을 위해 영화를 재촬영하는 것처럼 수술을 다시 할 것이 아니라면 이번 수술이 걸작이라고 서로 손을 잡고 믿는 수밖에 없다.
예술가의 재능이 흐릿한 자신을 믿는 것이라면, 외과 의사의 재능은 자신을 믿지 않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믿지 않아야 발전이 있고, 흐릿함에 현혹되지 않아야 생사의 기로에 선 남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오늘의 불완전함을 교훈 삼아야, 내일에는 더 나은 수술이 가능해진다. 불완전함을 깨닫지 못하고 얕은 재주와 작은 성취에 천착하는 것에서 안주가 시작된다. 세상에는 빼어난 사람들이 들판의 거미처럼 널려 있다. 나와 내 훌륭한 동료들이 만들어내는 촘촘하고 안전한 거미줄인 과학적 근거들에 기반하여, 보다 효과적인 새로운 약물 치료, 덜 고통스러운 새로운 수술법, 더 빠른 회복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치료 개념에 늘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한다. 거미줄은 보다 넓고 광활한 세상으로 매일 확장되고 있다. 내 자리의 좌표에 안주하다면, 오늘의 환자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내일의 환자에게도 죄를 짓게 된다. 더 진보하고 검증된 치료를 받을 기회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훌륭한 외과 의사의 마음은 겸손함과 오만함의 사이 어딘가에 있거나 아예 그 너머의 차원에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