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관타나모 물 전쟁
쿠바 혁명(1959년 1월 1일) 약 2년 뒤 미국과 쿠바는 국교를 단절했고 1962년 10월 ‘미사일 위기’로 세계를 핵전쟁의 위기로 내몰았다. 일촉즉발의 긴장은 미국이 앞서 터키와 중동에 설치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철수하고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또 소련이 쿠바 미사일기지 건설 계획을 철회함으로써 누그러졌고, 이 사태를 계기로 미·소 양국은 핫라인을 개통했다.
하지만 ‘위기’ 직후의 크고 작은 여진은 한동안 이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게 소위 ‘관타나모 물 전쟁’이었다.
1964년 1월 플로리다 키웨스트의 미 해안경비대가 영해에서 조업하던 쿠바 어선 3척을 나포했다. 선원 38명은 폭풍우에 휩쓸려 표류했다고 주장했지만 어선에는 약 2,500kg의 물고기가 실려 있었다. 평소라면 압수·경고·송환으로 끝날 일이었지만 플로리다 주정부는 14~16세 미성년자 7명만 송환하고 나머지는 먼로카운티 감옥에 수감해 재판을 받게 했다. 최대 징역 6개월과 벌금 500달러에 해당되는 ‘범죄’였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정부는 즉각 ‘냉전 침략행위’라고 비난하며 유엔 대표단을 통해 미사일 위기 사태의 재연을 경고했다. 그리고 2월 6일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에 대한 식수 등 물 공급을 전면 차단했다. 당시 수천 명의 관타나모 주둔군과 군무원 및 가족들은 기지 인근 야테라스(Yateras)강에서 월 1만4,000달러(당시 기준)를 내고 물을 공급받고 있었다. 피그스만 침공과 미사일 위기 때도 내버려 두던 급수 펌프 스위치를 꺼버린 것이었다.
당시 기지에는 15일분 물이 비축돼 있었다. 군 당국은 제한급수와 함께 유조선 등을 활용한 비상 급수대책을 마련했고, 백악관이 기지 내 쿠바 노동자 3,000명에 대한 즉각 해고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어부들이 석방·송환되면서 물 전쟁은 이내 끝났지만, 이 사태 직후 미국은 기지 내 영구 물 정화시설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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