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매일매일, 시시각각 한국일보 플랫폼은 빠르고 깊은 뉴스와 정보를 생산하고 있다. 1954년 창간 이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거나 국민적 감동을 이끌어낸 수많은 특종이 발굴됐다. 지난 70년 다수의 특종과 사건 중 파장이 컸던 내용들을 연도별로 안배해 선정한 ‘70대 특종’을 매주 월요일 뉴스이용자들에게 소개한다.
1961년 4월 30일 오전 9시 30분, 미국 하와이 트리플러(Tripler) 육군병원. 한국일보 정태연(1933~2013) 특파원이 16병동 388호실로 들어섰다. 어둡고 텅 빈 병실에 일순 놀랐지만, 바다가 보이는 건너편 베란다 나무의자에서 백발 노인을 찾을 수 있었다. 4.19 혁명으로 쫓기듯 하와이로 물러난 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한국 언론과의 첫 인터뷰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독재자의 카리스마는 사라졌어도 하와이 칩거 중에도 이 전 대통령의 관심은 온통 대한민국이었다. 안부 인사를 나누자마자, 망명 후 처음 만난 한국 기자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정은 요사이 어떻지?”, “(춘궁기 어려운 농촌 사정에 대해) 어떤 해결책이 있겠나”라고 물었다.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참 어려운 고비일 텐데…"라고 한탄하거나, 낙담한 듯 두 무릎 위의 양 손가락이 자꾸 경련을 일으켰다고 당시 기사는 전하고 있다.
이달 초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개봉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진영 대결의 핵심 소재로 떠올랐다. △독립운동 자금을 착복해 호화생활을 누린 친일파 △6.25 전쟁 초기 북한 침략군에게 서울시민을 내던지고 도망친 독재자라는 나쁜 이미지는 조작이며, 역경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영웅으로 재인식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도 권좌에서 물러난 뒤, 이 전 대통령의 말년은 소홀히 다루고 있다. 병상에 누운 80대 노인 이승만의 열악한 상황과 조국에 대한 애틋한 심정은 당시에도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서만 알려졌다. 열악한 통신 사정 탓에, 인터뷰 이후 며칠 걸려 비행기편으로 전달된 정 특파원의 원고와 사진은 5월 7일 자 한국일보에 <일요화제: 병상의 이승만 박사와 50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인터뷰에는 이 전 대통령의 병약한 상황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병환은 어떻습니까’라는 물음에 “뭐 별로 염려할 정도는 못 돼. 등에 무엇이 나서 그 치료를 하고 있지”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조국으로 돌아오고픈 수구초심의 심정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본국으로 돌아가실 의향은 없느냐’는 돌발 질문에, 긴 한숨을 내쉬면서 영어로 “I wish to…”(의역:돌아가야 하겠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눈에 띄는 건 이 전 대통령을 통제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그에 대한 기자의 부정적 시각. 정 특파원은 한가롭게 브라질 원산 화분을 자랑하거나, 사진을 찍을 때 여사가 대통령을 다그치는 행태를 가감없이 묘사하고 있다. 한국일보와의 인터뷰 이후에도 이 전 대통령 건강은 크게 회복되지 못했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현지시간 0시 35분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서거했다. 향년 90세.
이 인터뷰는 한국일보 70년사에서도 끈질기게 특종을 쫓는 한국일보 정신이 발휘된 대표 사례로 꼽힌다. 병원 당국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엄격한 통제로 미국 언론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정 특파원은 안내 데스크, 미군 간호부장, 프란체스카 여사 등 ‘세 관문’을 뚫어냈다. 그리고 이 전 대통령이 입원 중인 16병동 388호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인터뷰 기사는 이 전 대통령 동향에 관심 많았던 국내 독자들의 주목을 끈 것은 물론, 생애 말년 이 전 대통령의 행적과 심경을 추측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코리아타임스 사장(1986년)을 지낸 정태연 특파원은 1965년에도 비슷한 해외 취재 특종을 해냈다. 차균희 농림장관의 70대 노부모가 중공(당시 호칭) 당국의 특별조치로 귀환하는 상황을 재빨리 확인, 경유지 홍콩으로 날아가 경쟁지를 따돌리고 단독 인터뷰(1월 21일 자 보도)에 성공한 것. 정 특파원은 생전에도 종종 그가 이룬 일련의 특종에 대해, "한국일보 특유의 조직문화가 이뤄낸 성과"라고 정의했다.
한국일보 70년ㆍ70대 특종(연도순)
1 | 하와이 망명 이승만 전 대통령 단독 인터뷰(1961) |
2 | 케네디 암살 외신 속보 특종(1963) |
3 | 도굴범에 의한 경주 석가탑 훼손(1966) |
4 | 한국일보 탐사대, 경주 앞바다 문무왕릉 확인(1967) |
5 | 설악산 ‘죽음의 계곡’ 산악등반대 조난사고 (1969) |
※ 다음은 1961년 5월, 화제가 됐던 이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기사 전문. 보편적 인권과 양성평등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수준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1960년대의 부적절한 단어와 표현도 원문 그대로 인용했다.
<병상의 이승만 박사와 50분>
하와이 트리풀러 육군병원 3층 16병동 388호실의 주인
망명 후 최초로 세 관문 뚫고 성공한 단독 인터뷰
말꼬리를 흐리며……이박사 “돌아가긴 해야겠는데……”
농촌 사정 어렵다면서요, 남미 화분 자랑하는 「프」여사
수심속에도 건강의 빛. 스티븐슨 제안에는 종내 입다물고
[호놀룰루(와이키키) 해변에서 본사 정태연 특파원발 항공편]
시내에서 약 십 마일 떨어진 ‘무아라루아’라는 나직한 언덕 중턱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트리풀러’(TRIPLER ARMY HOSPITAL) 육군병원에 입원중인 이승만 박사를 찾아간 것이 지난 30일 상오 9시 13분. 한편 안내석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닥터 • 승만 • 리』를 면회하러 왔다고 이야기했더니 잘생기지도 않은 이 여인이 기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그 분 면회는 누구를 막론하고 금지되어 있다고 딱 잘라버리고 만다.
그러고보니 이 박사가 작년 4월 학생 「데모」에 굴복하여 대통령 자리를 내놓고 부랴부랴 서둘러 극비밀리에 이곳으로 망명(亡命)해온 이후 미국 각 통신 신문사 기자들이 수없이 찾아와 회견을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어도 여태까지 한 사람도 성공치 못하고 돌아간 사실이 다시 기억된다. 약 일주일전에는 이곳 지방 신문사 기자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없는 사이를 틈타 겨우 박사를 만나 몇 마디 물어 보려고 하는 찰나에 어디서인지 부인이 나타나 이 기자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 박사를 다른 방으로 끌고 들어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 기자는 그 이튿날 신문에 프란체스카의 말을 욕하는 기사를 크게 실어 화젯거리가 되었다는 정도다.
나는 이 못생긴 여인에게 다시 사정을 했다. 내일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는데 오늘 꼭 좀 만나야 하겠다고 몇 번씩 설명하니까 귀찮았던지 그러면 2층에 올라가 오른쪽으로 있는 제16병동 간호원에게 물어보라고 하며 일단 통과를 시킨다. 한숨에 달려 올라가 간호부장인 소령을 만나 기자라는 것을 감추고 면회 신청을 했더니 아무도 못 만나게 되어있는데 꼭 원한다면 그 부인에게 허가를 얻어보겠다고 하면서 옆에 서있는 남자 중위에게 가보라고 명령한다.
조금 기다리니까 프란체스카 여사가 중위 뒤를 따라 나온다. 콧날이 오뚝 서고 쑥 들어간 파란 눈을 휘둥거리며 기자에게 가까이 온다. 저쪽에서 묻기 전에 먼저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들렀는데 잠깐 뵈러 왔다고 말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름도 묻지 않고 저 의사의 지시도 있고 하니 너무 오래 이야기 하지 말라고 잠깐만 만나라고 하면서 입원중인 제 388호실로 안내한다.
다시 침대 하나가 놓여있는 어두침침한 병실을 지나 건너편 베란다로 나서니 바로 문 옆 벽 쪽에 이 박사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앞에 전개 되어있는 마을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짙은 하늘색 환자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데다가 솔솔 부는 바람으로 엉성한 백발이 몹시 초라하게 보이는 이 박사는 등을 의자에 기대지 못하고 엉거주춤 앉은 채로 기자의 손을 잡고 반가워하며 “그래. 어디서 왔지?”하며 좀 더듬으나 똑똑한 우리말 소리로 묻는다. 안면 신경통때문인지 왼쪽 눈을 잘 뜨지 못하며 가끔 오른쪽 뺨에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신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닷새 전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는 한국일보 기자입니다”하고는 문득 기자라는 말을 꺼내 버린 사실에 놀라 주위를 보니 마침 부인은 방안으로 들어가고 없어 한숨을 내뿜었다. 하기야 부인이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저, 병환은 좀 어떻습니까?” “뭐 별로 염려할 정도는 못돼. 등에 무엇이 나서 그 치료를 하고 있지.”하고 손으로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정은 요사이 어떻지?”하며 퍽 궁금한 표정으로 옆의 의자에 자리를 권하며 묻는다. “그저 잘 되어 나가고 있으나 봄철을 당해 농민들과 세궁민들의 생활이 나빠져 무척 고생들 하고 있습니다.” “그래? 참 어려운 고비일텐데……”하며 멀리 바다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래, 어떻게 해결책이 있겠나?”하고 연달아 묻는다. “대학을 나온 청년들을 풀어 국토개발사업을 하고 있는데 뭐 아직은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하고 설명하는 것을 자세히 듣는 이박사의 두 무릎 위의 양 손가락이 자꾸 경련을 일으킨다.
“유엔에서 미국 스티븐슨 대표가 한국 통일문제를 토론하는데 북한 괴뢰를 참석시키자는 제안을 해서 국내외에 적지 않은 여론이 일어나고 있는데요……”하고 환자에게는 좀 무리한 질문을 했더니 다시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 5초, 10초, 20초 기다려도 말을 꺼내지 않는데 옆의 문이 열리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종이와 만년필을 가지고 들어와 기자에게 내민다. 이름과 직업을 적어달라고 한다. 우물쭈물하고 있으니까, 보통 방문객을 거절하고 있으나 이렇게 면회를 한 분은 꼭 방명록에 기록한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하는 수없이 영어로 이름과 기자라는 것을 적어 보이자 갑자기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는 표정이다.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목소리를 가다듬어 하와이가 참 아름답지 않느냐는 둥 엉뚱한 질문을 한다. “신문을 통해 듣는데 춘궁기의 농촌 사정이 형편없다고요”하며 선뜻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이박사에게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다. 한국말로 이 박사에게 “본국으로 돌아가실 의향은 없으십니까?”하고 불쑥 물었더니 긴 한숨을 내쉬면서 간단하게 “I wish to……”(의역: 돌아가야 하겠는데)하고 말끝을 흐려버린다. 이때 이곳 외과 과장 휴스 박사가 와서 아침인사를 하면서 이삼일안에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돌아간다.
“퇴원하시면 낚시질하러 해변가에 나가시겠지요”하고 이번에는 영어로 물었더니 이박사는 껄껄 웃고 부인이 가로채어 이젠 낚시도 안한다고 대답한다. 녹색 원피스에 젊은이같이 차려 입은 프 여사는 벌떡 일어나서 베란다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대여섯 개 되는 화분을 가리키며 “이 꽃은 남미의 브라질산인데 참 비싼 겁니다. 참 예쁘지요?”하며 울긋불긋한 꽃잎을 어루만진다.
대꾸도 하지않고 일어서면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까 다시 한 번 놀라면서 망설이더니 마지못해 옆자리에 가서 나란히 앉으면서 카메라를 대니까 “Open your eye, Open your eye”(당신 한쪽 눈을 떠요, 떠!)하며 극성스런 소리로 감긴 한쪽 눈을 뜨라고 야단이다. 그러니까 억지로 왼쪽 눈을 떠 보이며 포즈를 취하는 그 모습…… 만 13년 동안을 두고 천하를 다스리던 독재자가 이제는 2천마일이 넘는 태평양 한복판의 이 작은 섬으로 와서 이렇게 서글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오 10시 20분, 서울로 돌아갈 때 또 들러 달라는 이 박사의 당부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오는 길에 병실을 살피니 침대 머리맡 쪽의 작은 책상 위에 붓글씨로 표지가 씌어져 있는 작은 기록책과 두서너 권의 이름 모를 책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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