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3월 10일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다. 마흔이 넘은 누군가가 "볼만한 21세기 영화 세 편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버드맨' '로마' '노매드랜드'를 꼽고 싶다. 모두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는데 감독들이 멕시코나 중국인(맨 뒤 영화)이다. 이 상이 나름의 세계성이 있다고 보는 이유다. 세 영화는 따스한 연민으로 고독한 이들의 삶을 담아서 공감을 준다.
영화 감상을 시작한 20대가 볼 세 편을 물어 오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양들의 침묵'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을 꼽고 싶다. 모두 '그랜드 슬램 영화'다. 작품 감독 각본(각색) 남우주연 여우주연이라는 5대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받은 셋뿐인 영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마지막 황제' 같은 대작이나 '아마데우스' '아웃 오브 아프리카' '늑대와 춤을' 같은 명작도 못 이룬 것을 생각해 보면 대단하다고 하겠다.
이 그랜드 슬램 영화들은 모두 소설이 원작이다. 5대 부문 중 하나를 놓친 '세미 그랜드 슬램'도 소설 원작이 많다. '프렌치 커넥션' '애정의 조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등이다. 3관왕, 2관왕까지 내려오면 '대부' '반지의 제왕'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 엑셀 작업이 필요할 만큼 대단히 많다. 이 상은 올해 96회인데 초·중기를 보면 "소설에 의존했다"고 할 만큼 수상작 가운데 소설 원작이 많다. 올해 11개 부문 후보인 '가여운 것들'이 그렇다. 주요 후보인 '플라워 킬링 문' '오펜하이머'는 논픽션이 원작이다.
본격 소설이 원작일 경우 영화 속 인물은 깊이와 생동감을 가진다. 소설은 인과와 반전으로 단단하게 통일된 구조를 제공한다. 감독과 배우는 100쪽 안팎의 소책자 대본을 받는데 원작 소설이 있다면 인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받는다. 극작가는 미지의 이야기를 만드는 수렁에서 쉽게 나올 수 있다.
'그랜드 슬램' 중 하나를 꼽으라면 원작이 퓰리처상을 받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일 것 같다. 뻐꾸기는 자기 알을 남의 둥지에 몰래 넣어 다른 새가 기르게 한다. 뻐꾸기는 자라면서 남의 둥지에서 다른 새끼들 사이에 대장 노릇을 한다. 이 영화는 주객이 바뀐 사회를 재미있게 비유했다. 환자가 주인이어야 할 정신병원에서 오만하게 군림하는 의료인에 저항하는 가짜 환자를 그렸다. 제목은 정신병원을 박차고 나가는 작은 영웅을 말한다.
우리도 소설 원작인 명작은 '만다라' '하얀 전쟁' '태백산맥' '서편제' '공동경비구역 JSA' '도가니' '밀양' '남한산성' '버닝'처럼 줄기를 이룬다. 지금 우리 영화가 슬럼프에 빠진 것은 명작 만들기를 억압하는 요소들 때문이 아닐까? "천만 영화 만드는 법에 찌든 감독" "영화에 대한 소양이 너무 적은 투자사 사람" "명작으로 세계에 나가려는 의지가 약한 제작자" 등이 꼽힌다.
이들을 홀연히 떨치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갈 영화'들이 기다려진다. 소설이 원작인 영화가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소설이면 더 좋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세계의 공감을 살 보편성이 더 중요하니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쓴 '버닝'이 단초를 보여줬다. 이런 영화들이 이어져 뻐꾸기 둥지가 결국은 너나 없이 좋은 생태계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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