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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2년 6월, 18세기 러시아 개혁 군주 표트르 대제 탄생 350주년을 맞아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에서 무엇인가를 빼앗은 것이 아니고 되찾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해 2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려는 발언으로 해석돼 전 세계 언론의 비판이 쏟아졌다. 푸틴은 이어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했을 때조차 유럽 어느 나라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며 우크라이나 철군 가능성에 쐐기를 박았다.
□ 오래전 취재차 들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도시답게 곳곳에서 그의 동상과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동상은 표트르 대제가 이 지역 점령 후 유럽을 향한 전초기지로 건설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놓여 있던 좌상이다. 실제 얼굴을 본떠 만든 머리에 비해 몸통과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긴데, 많은 사람이 만져 반들반들해진 팔다리를 보며 주민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반면 스웨덴은 표트르 대제와 겨룬 북방전쟁 패배 후 쇠퇴의 길을 걷는다. 두 차례 실지 회복 전쟁은 뜻을 이루지 못했고,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러시아에 또 패하며 1809년 핀란드 전역을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 이후 핀란드가 러시아 자치국이 돼 러시아와 국경을 접할 일이 사라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웨덴이 200년 넘는 중립 외교를 고수해 온 배경에는 이런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 스웨덴이 러시아에 오래전 패배를 되갚으며 당당하게 유럽의 일원으로 복귀할 기회를 잡았으니, 바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이다.
□ 스웨덴의 나토 가입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표트르 대제의 후예임을 자처한 푸틴에게는 뼈아픈 일격이다. 표트르 대제의 최대 업적인 발트해를 통한 유럽 진출 통로가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핀란드도 나토에 가입하면서 적대국과의 국경이 1,340㎞나 늘어났다. 2년 전 어설픈 표트르 대제 흉내 내기의 결과가 이렇게 심각한 것일지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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