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수 작가가 꼽은 책,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자기 서재를 둘러보던 반지수 작가는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미우 발행)을 꺼내 들었다. 원래 자그마한 판형으로 한 번 출간됐다가 '완전판'이란 이름으로 다시 나왔다. 완전판이 따로 있다기보다 판형을 원래 책 크기대로 키운 것인데, 우리가 흔히 보는 일반적 책보다 길이가 더 길고 폭은 약간 넓다. 그 덕에 그림이 시원하게 자리 잡았다.
책을 펴 보면 일단 정교한 그림이 놀랍다. 인물, 풍경 묘사가 정말 정교하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맛은 강렬한데, 내용은 좀 싱겁다. 중년 남성 샐러리맨이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얘기다. 대사나 설명문은 거의 없다. 앞부분 몇 페이지를 지나면 색마저도 없어진다. 그저 이리저리 다니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 가벼운 해프닝이 전부다. 이게 뭐야 싶은데, 사람 냄새 나는 여느 대도시 뒷골목 풍경 같아 묘한 힐링을 준다.
"만화 '고독한 미식가' 아시죠? 그분이 그린 거예요." 그러고 보니 '고독한 미식가'도 음식 얘기를 넣었다 뿐, 결국 낯선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밥집에 들르는 중년 샐러리맨 이야기다.
"맞아요. '산책'이나 '우연한 산보'처럼 이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이야기들이에요. 일본보다 프랑스에서 훨씬 더 인정받는, 작품 수가 적은 과작 작가였고 '만화가들의 만화가'라 불리는 작가이지요. 저도 산책을 좋아하는 데다 제가 앞으로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방향과 너무 잘 맞아서 정말 좋아하는 작가예요. 이분 책은 뭐든 보세요. 한번 보시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가벼워지는 기분이 드실 거예요."
그러면서 창 밖으로 손을 뻗었다. "제가 사실 여기로 이사 온 것도 막 돌아다니고 싶어서였거든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창 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쭉 이어지는 인천 검단 신도시 아파트 단지 사이로 실개천이 하나 흘렀고, 그 주변으론 산책로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몇 년 뒤 반지수 작가의 '검단 산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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