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 젠슨 황에 전화 건 64세 모리스 창
엔비디아 AI 칩 생산 요청 무시한 삼성
‘시스템반도체 1위’ 이재용 비전 안갯속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 1993년 엔비디아를 창업한 젠슨 황은 2년 뒤 대만 TSMC에 편지를 보내 그래픽처리장치(GPU) 생산을 부탁했다. 엔비디아가 설계한 GPU가 게이머들에게 호평받자 용기를 내 편지를 썼지만 워낙 초창기라 답장은 기대도 안 했다. 이때 젠슨 황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승낙한 이가 바로 모리스 창 TSMC 회장이다. 당시 두 사람은 64세와 32세라는 나이, 대기업과 신생 기업이란 차이에도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가 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 2022년 엔비디아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을 삼성전자에 요청했다. 챗GPT 광풍으로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고 이를 위한 AI 반도체 패키지(가속기)에 들어갈 HBM 수요가 급증하던 때다. 그러나 삼성의 HBM연구팀은 이미 해체된 뒤였다. 삼성은 시장 규모가 크지 않고 불확실성도 높은 HBM에 회의적이었다. 결국 계약은 이뤄지지 못했다. 삼성은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제 발로 찼다. 호박은 SK하이닉스에 갔다.
엔비디아가 메모리 반도체 최강자 삼성전자가 아닌 TSMC와 손을 잡게 된 배경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AI를 학습시킬 때 필요한 대용량 초고속 반도체 패키지와 솔루션을 제공하는 엔비디아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기업이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엔비디아의 AI 가속기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시가 총액은 2조2,000억 달러(약 3,000조 원)를 넘어, MS와 애플에 이은 글로벌 3위다. 삼성전자의 7배다.
사실 엔비디아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컴퓨터 게임의 그래픽 구현을 지원하는 GPU 회사로 출발한 엔비디아는 10여 년 전만 해도 게임 강국 한국의 PC방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영업을 하던 곳이었다. 이후 대규모 병렬 연산과 단순 데이터 처리에 유리한 GPU가 AI 학습에도 유용한 것으로 드러나며 AI 시대 최대 수혜자로 떠올랐다.
엔비디아가 18일 차세대 AI 반도체 ‘블랙웰’을 발표하며 ‘역대 가장 강력한 칩’이라고 강조했다. 1992년 64메가 D램 개발 이후 2006년 50나노 1기가 D램 개발, 2015년 6세대 V낸드 양산 등 30여 년간 반도체 부문 세계 최초 기록 제조기는 줄곧 삼성전자였다. 이젠 그 자리도 위협받고 있다. 삼성전자 HBM을 테스트 중이란 젠슨 황의 언급에 20일 삼성전자 주가가 급등한 건 기쁘면서도 씁쓸하다.
삼성이 삼성 같지 않다는 얘기가 적잖다. 1등 삼성은커녕 2019년 이재용 회장이 직접 발표한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도 불확실해졌다. 2030년까지 메모리뿐 아니라 비메모리, 즉 반도체 설계(팹리스)와 주문생산(파운드리) 등에서도 세계 정상에 오르겠다는 선언이었지만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지난 5년간 파운드리 1위 TSMC의 시장 점유율은 50%에서 60%로 커진 반면 2위 삼성전자는 20%에서 10%로 감소했다.
위기에도 삼성전자 경영진은 크게 바뀐 게 없다. 일각에선 신상필벌 인사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한다. 이건희 전 회장이었다면 등에 식은땀이 나 잠이 안 온다고 했을 법한데 그런 위기의식조차 안 보인다. 그 이유를 한 재계 관계자는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인 상황에서 공격적인 인사가 단행되는 데엔 제한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변화와 세대교체에 방점이 찍힌 다른 대기업 인사와 대비된다. 또 다른 이는 “근원 경쟁력인 연구개발(R&D)보다 정치에 잘 보이기 위해 가시적인 시설투자에 주력한 게 아픈 대목”이라고 꼬집었다.
가죽점퍼를 입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미래를 제시한 젠슨 황의 모습은 사실 이 회장이 서야 할 무대였다.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 회계부정 혐의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이 회장이 삼성을 삼성답게 되살리고, 이건희 전 회장을 뛰어넘는 승어부(勝於父)의 스토리를 써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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