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미도서상 수상작 ‘우주의 알’
환상으로 고발하는 현실의 잔혹함
‘환상하는 여자들’ 시리즈의 첫 작품
'토끼장(The Rabbit Hutch)', 한국 식으로 하면 '닭장'이라 불릴 비좁고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는 저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들. 주변 지역은 탈공업화와 경기침체 탓에 언론이 선정하는 “죽어가는 미국 도시 톱 10” 목록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쇠락했다. 무더운 밤 이 아파트의 “C4호에서 블랜딘 왓킨스는 육체에서 빠져나온다.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지만 이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며 살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미국 작가 테스 건티(31)의 장편소설 ‘우주의 알’의 배경이다.
소설의 첫 장부터 죽어가는 주인공인 왓킨스는 위탁가정 출신이다. 위탁가정에서 나와야 하는 18세 아이들을 위한 ‘독립 워크숍’에서 만난 소년 3명과 함께 토끼장 아파트에서 지낸다. 벽이 “굉장히 얇아서 모두의 삶이 나아가는 것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들을 수 있”는 이 아파트에는 각자의 위태롭고 불안한 삶이 뒤엉켜있다. 왓킨스뿐 아니라 이웃들 역시 저마다의 혼돈과 고통을 안은 채다.
물리적으로는 이토록 가까운 이웃들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보다는 위협이 된다. “따로따로 넣을 우리가 열 개는 있지 않으면” 서로 싸우기 시작해 피투성이 난장판이 되는 토끼장처럼. ‘우주의 알’은 이 토끼장 같은 아파트에서 단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일을 그린다.
깨진 ‘우주의 알’의 파편 같은 문장들
데뷔작인 ‘우주의 알’로 2022년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전미도서상의 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신인 작가 건티. 그는 지금 미국 문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처음 선보인 건티의 첫 소설을 소개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건 ‘환상’이다.
‘우주의 알’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한편으론 고여서 썩어가기에 감히 손댈 수 없는 사회 문제가 환상의 외피를 두른 채 등장한다. 보호자 없는 아이가 내쫓기듯 독립해 맞닥뜨려야 하는 날것의 세상과 아동학대, 고립, 정신장애 등. 작가는 신비주의를 탐닉하며 육체에서 빠져나오기를 갈망하는 왓킨스, 자신의 모공에서 색색의 섬유가 자란다고 믿는 대머리 남자, 죽어가는 소동물의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이런 잔혹한 현실을 고발한다.
소설의 구성도 초현실적이다. 각 장의 화자는 불친절하게 오락가락하고, 분량도 짧아 뒤쫓기가 쉽지 않다. 형식도 기사와 거기에 달린 댓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편지 사이를 거침없이 폭주한다. 문장은 마치 산산조각 난 ‘우주의 알’의 파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우주의 알'은 우주의 신비를 고민한 중세 여성 천재 철학자·예술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상상한, 4개의 계절로 구획된 둥근 공 모양의 지구다. 소설의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흡입력은 분명하다. “남자는 너무나 많이 아들이었고, 여자는 너무나 적게 어머니였다”는 아동학대의 역학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현실을 찌른다.
‘환상하는 여자들’의 시작
소설 속 환상은 감미롭거나 달콤하지 않다. 토끼장 속 왓킨스와 이웃들은 현실을 견딜 수 없어 기이한 행위에 몰두하나, 이들의 환상은 영원할 수 없다. “우리는 꿈으로부터 도피하여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재크의 말처럼. 소설 결말에 이르러 신비주의라는 환상에 투신했던 왓킨스에게 아래층 여성 조앤은 이렇게 말한다. “깨어있네요.” 환상에서 깨어난 왓킨스의 현실은 여전히 끔찍하지만, 그는 조앤을 이어 말한다. “네. 당신은요?” 미약하지만 분명한 현실에서의 행동이다.
‘우주의 알’은 출판사 은행나무의 '환상하는 여자들'이라는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해외 여성 작가 중에서 기이하고 아름다운 환상으로 현실을 비추는 작품을 선보이는 기획이다. 멕시코 작가 브랜다 로사노의 ‘마녀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에스더 이의 ‘Y/N’, 스페인 작가 라일라 마르티네스의 ‘나무좀’이 출간될 계획이다. ‘Y/N’은 K팝 아이돌의 은퇴 소식에 서울행 편도 비행기표를 산 독일에 사는 한인 여성의 이야기로,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의 주목받은 책 100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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