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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8000권에 일일이 비닐커버 씌운...'중국문학 번역 대부' 김태성의 서재

입력
2024.04.12 07: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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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이상 중국 문학 번역하면서
추리고 추려낸 8,000권의 책으로
중국 문학 전문 도서관을 꿈꾸는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번역가가 9일 경기 고양의 오피스텔 작업실에서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최주연 기자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번역가가 9일 경기 고양의 오피스텔 작업실에서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최주연 기자


"글쎄요. 중국이나 작가 쪽에 아직 물어보진 않았지만 '옌롄커 문학 도서관'이라고 이름 붙일까요?" 매년 가을 노벨문학상 시즌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후보로 거론되는 중국 소설가 옌롄커(閻連科·66). 워낙 친분이 깊은 데다 그의 주요 작품 대부분을 한국에 소개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아니면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이 다 중국 문학에 관련된 책들이니 '한중 문학 도서관'이라 할까요."

경기 일산에 위치한 번역가 김태성(65)의 작업실로 쓰이는 오피스텔. 들어서면 숨이 턱 막힐 것처럼 온 벽면을 둘러싸고 있는 책장에 5,000여 권의 책이 빽빽하게 가득 꽂혀 있다. 20여 년 전 정착한 오피스텔인데, 그때만 해도 오피스텔이 복층으로 많이 지어질 때라 책장을 큼지막하게 짜서 넣을 수 있는 단층형을 구하느라 오히려 고생했다고 한다.

한 권씩 비닐로 포장해둔, 한중 문학관을 꿈꾸는 공간

집에도 따로 3,000여 권이 더 있으니 보유장서는 8,000여 권 수준. 수십 년간 중국 베이징, 타이베이, 싱가포르, 홍콩 등을 드나들면서 사 모은 중국 문학, 인문서 중에 정리할 것은 정리한 뒤 그 가운데 엑기스만 뽑아다 남겨둔 책들이다. 그래서일까. 책마다 일일이 정성스레 비닐 커버를 다 씌워 뒀다. 여기저기 몇 권만 들춰봐도 비닐을 잘 오려서 예쁘게 접어 테이프로 일일이 붙여 고정해 둔 게 보통 정성이 아니다. "가끔 비닐끼리 눌어붙는 경우가 있어서 그나마 일부는 비닐을 도로 벗겨냈다"며 웃었다.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번역가가 그간 모아둔 중국 원서, 번역서 등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최주연 기자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번역가가 그간 모아둔 중국 원서, 번역서 등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최주연 기자

우편으로 부쳐 배에 실려 오면 혹여라도 책이 상할까 봐 여행가방과 보따리에다 손으로 이고 지고 끌고 오느라 어깨회전근개 파열을 겪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 출판 시장은 책 회전율이 빨라 석 달에서 반년 정도만 지나도 책을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흔하단다. 한국에는 출판사 재고분이라도 있는데 중국은 그렇지 못한 경우 또한 많다. 그러니 문학관을 꿈꾸는 사람으로선 언제 희귀본이 될지 모를, 그래서 순식간에 가격이 치솟을 수 있는 클래식한 책들은 발견하는 순간 사들여 애지중지 모셔둘 수밖에 없다.

이런 김 번역가를 두고 출판계는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라고 부른다. 한국외대 중문과 79학번인 그는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번역하다가 점차 번역의 세계로 빠져든 케이스다. 대학원생이던 1984~1985년부터 번역을 시작했는데 초창기엔 아무래도 영미문학을 했다.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번역가가 경기 고양의 작업실에서 책을 읽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번역가가 경기 고양의 작업실에서 책을 읽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중국과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나 접촉이 시작됐다. 이후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번역 작업에 나서면서 그간 작업한 중국 문학, 인문서만 150여 권에 이른다.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고 매년 6, 7차례 중국, 홍콩 등을 드나들며 작가들과 두려움 없이 맨몸으로 부딪치는 스타일이다. 이렇게 얻은 중국 작가들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후배 번역가들과의 작업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리쩌허우와 류짜이푸의 '고별혁명'... 번역가 인생 최고의 책

처음 중국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국내에 소개되는 책들이 영 성에 차지 않아서였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가 막 날아오르려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한국에서 중국 관련 서적이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는데도 그랬다. "그때 중국 시장에 도전해보겠다며 이런저런 서류를 챙겨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빈 깡통 차고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보다 못해 스유엔의 '상경(商經)'이나 런청진의 '변경(辨經)' 같은, 중국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좀 되겠다 싶은 책을 찾아다 아는 출판사를 통해 번역 소개했다. 그런데 이 책들이 수십만 부 팔려나가며 히트를 쳤다. 청나라 사업가 호설암(1823~1885)의 경영원칙을 담은 '상경'은 중국식 비즈니스 모델이 궁금했던 기업인에게 불티나게 팔렸다. 중국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담은 '변경' 또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읽은 책으로 알려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 문학과 본격적으로 연결된 건 실천문학사를 통해 중국 페미니즘 작가 티에닝(鐵凝·67)의 작품 번역을 맡으면서였다. 티에닝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 책 번역자인데, 이제 누나라 부르겠다"고 하면서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티에닝은 나중에 중국 작가들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중국작가협회 주석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의 도움으로 많은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대담함은 류짜이푸(劉再復·81)와의 만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천안문 사태로 망명 지식인이 됐던 류짜이푸는 20세기 중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혔던 리쩌허우(1930~2021)와 20세기 중국을 되돌아보는 '고별혁명'이란 대담집을 냈다.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하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다. 일단 이 책을 다 번역한 뒤 류짜이푸가 홍콩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그를 찾아가 번역 원고를 보여주고 출간 허락을 받아냈다. 일면식도 없던 상태였다.

세계적 철학가로 꼽힌 리쩌허우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세계적 철학가로 꼽힌 리쩌허우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김 번역가는 '고별혁명'을 번역가 인생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꼽는다. "과거 100년 동안 중국에서 벌어진 중요 사건들, 특히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인민들에게 펼쳐졌던 가혹하고 비이성적인 현실에 대해 당대 중국 최고의 두 지식인이 얘기를 나눴는데, 현대 중국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둬야 할 책"이라고 극찬했다. 어떻게든 출간 허락을 받아내야겠다고 결심한 뒤 무조건 '들이댄' 이유이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 옌롄커의 시적 문장에 반했다

이런 행동력에 감명을 받아서였을까. 다음에 만난 류짜이푸는 김 번역가에게 "다음에 네가 내야 할 책을 일러주겠다"고 했다. 그게 바로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다. 중국 작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했으나 반체제적 성향 때문에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은, 특히 한국에선 그를 아무도 모를 때였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인기는 대단했다. "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학생들이 책을 들고 와 사인을 부탁할 정도였다"며 웃었다. 소설과 달리 흥행엔 실패했지만,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후 옌롄커의 주요 작품들은 김 번역가 손을 거쳐 국내에 소개됐다.

옌롄커의 소설을 한국에서 영화화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한 장면.

옌롄커의 소설을 한국에서 영화화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한 장면.


김 번역가는 옌롄커를 두고 "중국 소설가 중에 드물게 문장이 시처럼 아름다운 작가이지만, 개인적으론 책 읽고 쓰는 것 외엔 아무것도 잘 모르는 참 순박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몇 년 전 옌롄커를 한국에 초청했을 때 안내와 통역 등을 맡았는데, 귀국해야 할 즈음 공항에 홀로 가는 게 무섭다며 김 번역가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이런 인연 덕에 자기 소설을 각국에 소개해준 30여 개국 번역가들을 초청하는 모임에 옌롄커는 언제나 김 번역가를 부른다.

옌롄커는 올 하반기쯤 출간 예정인 김 번역가의 첫 단독저작 '역자 후기'에 서문도 쓸 예정이다. 워낙 중국 문학을 많이 소개했으니 그간 쓴 역자 후기를 모으면 책 한 권은 너끈히 되겠다 싶어 시작한 작업이다. 옛 원고를 뼈대로 삼되, 대대적으로 고쳐 써야 한다. 중국 현대 작가의 주요 작품들을 시간순으로 일별하는 것이니 "일종의 '한국의 중국 문학 수용사'로 읽힐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19년 11월 방한 당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옌롄커.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 단골 손님이다. 뉴스1

2019년 11월 방한 당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옌롄커.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 단골 손님이다. 뉴스1

옌롄커에 대해선 안타까움도 있다고 했다. "중국 당국이 그의 작품을 금서로 자꾸 지정하니까 반체제 작가로만 알려져 있어요. 지난 시절의 고통을 다루다 보니 그렇게 보일 뿐이지 그의 작품 세계 자체가 반체제적이거나 하진 않거든요. 최근작이 금서로 지정되는 것도 예전에 지정됐으니 지금도 그렇다는, 약간 관성적인 면이 있어요. 그를 지나치게 '반체제 작가'로 보지 않았으면 해요."

소개하고픈 작가는 많다 ... 중국에 대한 편견 버려주길

이렇게 인연을 맺고 어울리게 된 중국 작가는 이제 200여 명 수준. 주요 작가와는 대략적으로 다 연결돼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중국 문학 관련 행사가 있으면 주제에 맞는 참석 작가 선별, 작가와의 참석 조율, 한국에서의 통역과 가이드 역할까지 대부분 김 번역가가 떠안는다.

아직도 좀 더 소개하고픈 작가들이 넘쳐난다. "대표적으로 장청즈(張承志) 같은 작가가 있어요. 한국엔 전혀 안 알려진 분이죠. 이분도 약간 반체제적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기 한데. 작품들을 보니 모두 좋을뿐더러 평가도 좋아요." 장청즈는 이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며 인세로 받은 돈 3만 달러를 들고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난민들에게 매일 10달러씩 지원하는 이벤트를 벌인 행동파이기도 하다.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번역가가 번역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중국 문학 번역계의 대부 김태성 번역가가 번역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중국 문학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점은 아쉽다. 아무래도 서구화된 세상, 서구를 기준으로 삼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이웃일 수밖에 없는 중국에 대한 이해는 조금 더 넓어져야 한다.

"중국에 대한 한국의 관심은 아직도 호기심 단계에 있다고 할까요. 나오는 책들도 보면 루쉰,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삼국지 같은 특정 주제들뿐이에요.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차지하는 비중을 따지면 그런 주제들은 100분의 1도 채 안 될 거예요. 제 서재에서 진짜 현대 중국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볼 시간이 오길 기대합니다."


조태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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