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매일매일, 시시각각 한국일보 플랫폼은 경쟁매체보다 빠르고 깊은 뉴스와 정보를 생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1954년 창간 이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거나 국민적 감동을 이끌어낸 수많은 특종이 발굴됐다. 지난 70년 다수의 특종과 사건 중 파장이 컸던 내용들을 연도별로 안배하고 ‘70대 특종’을 골라내 뉴스 이용자들에게 소개한다.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대낮,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오후 2시쯤 공중파 방송이 중단되고, 수도권 지역에 적기의 공습이 가해지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당황한 시민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한국일보 편집국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어린이날 휴무였지만, 비상연락망과 취재망을 가동해 진상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속보 체제를 갖췄다.
진상은 승객과 승무원 105명을 태운 중국 민항기가 납치됐다는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민항총국 소속 호커 트라이던트 2E 여객기(기번 CAAC 296)가 대만(당시 중화민국)으로의 망명을 기도하는 6명에게 납치됐으며, 우리 영공을 침범한 뒤 강원 춘천의 주한미군이 관리하는 '캠프 페이지'(Camp Page)에 비상 착륙했다. 이 여객기는 랴오닝성 선양 공항을 출발하여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으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적성국이던 중공 비행기가 영공을 침범했기 때문에 서울, 경기, 강원 지역에는 난데없이 공습경보가 울렸고 실제 상황이라는 다급한 목소리의 방송이 나왔다. 영공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초계 중이던 F-5 전투기 등이 서울, 경기, 춘천 지역에서 굉음을 내며 오가는 바람에 시민들의 동요는 더욱 컸다. 반면 한국일보는 편집국과 공무국을 신속하게 가동하는 한편, 춘천에 사회부 경찰팀을 급파했다. 한국일보 취재진은 곧바로 5일 자 발행된 ‘호외 1호’에서 특종을 했다. 민항기 납치 범인들은 여자 1명이 낀 군인 6명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독자들에게 알렸다. 한국일보는 이후에도 이틀간 추가로 호외를 발행했다. 6일 자 2ㆍ3호, 9일 자 4호 호외였다.
민항기 불시착은 한중 수교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중공 측은 5월 7일 준각료급인 중공민항 총국장 센토를 대표로 하는 33명 협상단을 서울로 보냈다. 이는 6·25 이후 한국과 중국의 첫 공식 접촉이었고 협상단은 10일 양국 국호를 명기한 각서를 교환했다. 체류 기간 여객기 탑승객들은 한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10일 오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중공 민항기 불시착과 그에 따른 한중 간 공식 협상의 외교사적 의미를 파악한 한국일보는 11일 자부터 ‘한중 관계의 새 장’을 분석하는 기사도 연재했다. 연재기사 집필은 이재무ㆍ박찬식 기자, 송효빈 도쿄특파원, 이문희 워싱턴특파원이 차례로 맡았다.
한편 여객기 납치범들은 국내에서 재판을 받고 각각 4~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1년가량 복역하다가 형 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인도적 차원에서 중화민국으로 추방됐다.
한국일보 70년·70대 특종 (연도순)
15 | 最古(최고)의 태극기를 찾았다(1979) |
16 |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구하자(1981) |
17 | 중국 민항기 납치 호외 특종(1983) |
18 | 독극물 협박사건(1985) |
19 | 서울대생 이동수 분신 사건(사진·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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