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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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무총장의 아들이 '세자(世子)'로 통했다는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자녀 특혜 채용 논란이 소환한 기억 하나. 작년 이맘때 영국 일간 가디언 기사다. 2018년 국제금융기구인 세계은행(WB)의 회의에서 고위 간부가 한 말씀 하신다. "우리와 일하게 될 왕자님(prince)이 있다. 젊고 똑똑하다. 미국 재무부 차관의 아들이다. 우리한테 도움이 되신 바로 그분 말이다." 당시 WB 산하 기관 입사가 확정됐던 20대 남성이 하루아침에 '왕자(王子)'로 승격된 순간이다.
녹취록을 가디언에 넘긴 내부 고발자는 당시 회의를 가리켜 "미 재무부가 WB의 130억 달러(약 18조 원) 유상증자 계획을 지지한 직후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녹취록 속 간부는 갸륵한 한마디를 더 보탠다. "왕자를 행복하게 만들자. 안 그랬다가는 지 아빠한테 뛰어갈 수도 있으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 분야 '실세'로 불렸던 데이비드 맬패스 전 재무부 차관. 그는 얼마 안 있어 WB의 13대 총재(2019~2023년)에도 오른다. 공교롭기도 하여라.
보도 직후 WB는 펄펄 뛰었다. 특혜 채용은 물론 특별 대우도 없었다는 것이다. 가족이 동시에 근무할 수 없는 WB 내부 규정에 따라, 맬패스 전 차관이 총재로 취임한 직후 장남이 퇴사한 사실도 강조했다. 하지만 내부 고발자는 WB가 경제계 유력 인사의 자녀를 고용한 건 처음도 아니었다며 "가뜩이나 승진 기회가 부족한 직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하소연했다. 진위 여부를 떠나 '아빠 찬스' 논란이 만국 공통어란 사실에, '평범한' 아버지를 둔 '떳떳한' 딸내미는 새삼스레 허무해진다.
노래를 만들어 불러도 되겠다. 이런 식이다. '없는 자리 만들고~ 면접관은 아빠 친구들~ 점수 조작 나서고~ 결과는 만점~ 규정 무시하고 관사 제공하시니~'. 선관위 전·현직 직원의 아들딸은 물론 예비 사위까지 부정한 방식으로 채용돼 나랏밥을 먹고 있었다. 새끼를 위해 못 할 짓이 없었던 비뚤어진 부모가 남의 새끼인 사위까지 끔찍이 챙긴 오지랖에 말문이 막힌다. 고위직부터 중간 간부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위법과 편법을 오갔다. 다른 곳도 아닌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기관이 불공정의 끝판왕이 뭔지 제대로 보여줬다.
적발된 채용 비리 건수가 1,200건이라고 한다. 조직적 증거 인멸과 감사 방해까지. 누가 누가 더 부정(不正)한지 직원들끼리 대결이라도 벌인 게 틀림없다. 안 그러면 이런 전무후무한 일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감사원은 "위법·부당한 인사 행태가 장기간 방치돼 관행화됐다"는 말로 이번 조사 결과를 설명했다. 감시도, 내부 문제 제기도 없었다는 얘기다.
실제 선관위는 독립적 헌법기관임을 내세워 자체 감사를 고집하다가 이번 일이 들통났다. 비리를 저질러도 참 치사하고 음흉하게도 저질렀다. 그래서 더 괘씸하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재수 없이 적발됐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 안일함과 판단력만으로도 관련자들은 자격 미달이었다. 공을 넘겨받은 검찰의 수사와 사법 당국의 일벌백계가 남았다. 평범한 어버이를 둔 떳떳한 아들, 딸들이 허무함을 참아내고 세자들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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