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검장 사직글 '부끄러움 중요'
검찰, '공정한 관찰자'의 양심 있나
범죄 혐의자마저 후안무치 다반사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옛말에 ‘청렴하지 않으면 못 받는 것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면 못 할 짓이 없다. 그래서 글을 가르치기 전에 부끄러움을 아는 것부터 가르쳤다’는 말이 있다. 요즘 이 부끄러움을 갖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난 13일 사의를 밝힌 최경규 부산고검장이 검찰 내부 전산망에 올린 글이라고 한다. 그가 부끄러움을 꺼낸 맥락은 알 수 없지만 검찰 고위 인사가 샤이(shy) 뜻의 부끄러움을 지칭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언급한 부끄러움은 아마도 양심의 가책과 관련된 셰임(shame)일 터다. 통상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잘못한 것도 모자라, 잘못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양심 마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가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사직글은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직접적으로 촉구하거나 검찰의 나태를 질타하는 것보다 더 의미심장한 함의가 담긴 것으로 느껴졌다.
부끄러움을 유발하는 양심이란 대체 무엇일까. 지금 상황에선 애덤 스미스가 ‘내면의 재판관’ ‘마음속의 위대한 동거인’이라고 불렀던 ‘공정한 관찰자’보다 더 적절한 정의도 없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 번영의 동력으로 자기애와 이기심을 적극 내세우면서도 자기애의 충동과 왜곡을 억제하고 조정하는 양심, 즉 공정한 관찰자의 역할과 영향을 간과하지 않았다.
양심은 일종의 마지노선으로 일반인들이 매번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따를 수는 없지만 검찰에겐 이는 양심 이전에 일반적인 직업 윤리다. 검찰이 때로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지만 그 직업 윤리의 추락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양심마저 마비됐다면 단순한 부패보다 더 심각한 타락의 단계에 와 있다는 뜻이다.
내로남불이 체질화한 정치권에선 부끄러움이 이미 실종된 상태다. 진영 대립이 격화하면서 공정한 관찰자로서의 양심을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 패싱 인사’에 불만을 터뜨린 당사자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180도 입장을 바꿔 똑 같은 행태를 반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양심이 있다면 그럴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영 논리 속에서 양심의 소리가 말라 버린 정치 행태에 윤 대통령이 익숙해졌다고 치면, 총장 패싱 의혹이 제기된 최근 검찰 고위 간부 인사도 예상 밖의 일은 아닌 셈이다.
검찰 역시도 이미 진영에 편입돼 부끄러움을 모르는 양심 마비 상태이기에 이번 인사에 대해 침묵하는 게 아닐까 싶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인사에 항의하며 사표를 던지는 간부는 없을 듯 싶다. 하지만 공정성과 함께 부끄러움마저 잃은 검찰에 돌아오는 것은 한 진영의 사냥개라는 비아냥일 뿐이다. 지난 4· 10총선에서 편법 대출을 시인하고도 되레 큰소리를 치던 양문석 더불어민주당 당선자처럼 범죄 혐의자들이 검찰 수사에 대해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정의를 외치는 후안무치한 행태를 앞으로 더 많이 보게 될 것 같다.
보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양심 마비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추적한, 한나 아렌트의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의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주요 요인 중의 하나가 그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외부로부터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에게 누구도 그가 잘못됐다고 반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지금 검찰에 필요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전시작전통제권 관련 연설에서 남긴 그 유명한, 벼락 같은 외침이지 않을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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