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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찾아 15년간 세계를 떠돈 끝에 얻은 해답은?

입력
2024.05.31 12: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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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세계적 철학 잡지 '뉴 필로소퍼' 창간한
안토니아 케이스의 '이 삶이 당신을...'
15년간 세계를 떠돌아다닌 끝에
금융인에서 편집자로 변신한 과정 담아

'뉴 필로소퍼' 창간인인 안토니아 케이스. '터치다운 토니'라 불렸던 저돌적 커리어우먼의 삶을 접고 서점을 열고 교양 철학 잡지를 만들었다. 블룸스버리출판사 제공

'뉴 필로소퍼' 창간인인 안토니아 케이스. '터치다운 토니'라 불렸던 저돌적 커리어우먼의 삶을 접고 서점을 열고 교양 철학 잡지를 만들었다. 블룸스버리출판사 제공


책을 딱 한 줄로 요약하자면, 큰 금융회사에서 잘나가던 어느 호주 여성이 그간 쌓아온 커리어를 모두 다 접어버리고 15년 정도 세상을 방랑하다 문득 철학 교양 잡지를 창간해 버리고야 만 이야기다. 인구 2,500만 수준인 호주에서, 디지털 시대에 종이 매체인 잡지를, 그것도 철학을 다루는 잡지를 만들겠다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너 미쳤구나."

2013년 '뉴 필로소퍼(New Philosopher)'는 그렇게 태어났다. 더더욱 거세진 디지털 바람 속에서도 10년을 넘긴 이 잡지는 이제 호주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영국, 뉴질랜드 등 30여 개국에서 출간되는, 중국어와 아랍어는 물론 한국에서도 바다출판사가 한국어판을 출간하는 대표적인 철학 교양 잡지가 됐다. 뉴 필로소퍼의 성공에 힘입어 여성 잡지 우먼카인드(Womankind)도 만들었다. 두 잡지 모두 광고 하나 없이 오직 구독료로만 운영된다.

어쩌다 잡지, 그것도 철학 잡지를

어쩌다 이런 청개구리 짓을 하게 됐을까. 잡지 창간자 안토니아 케이스가 쓴 '이 삶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었든'은 그 과정에 대한 책이다. 책 성격상 저자는 분석적 문장을 쓰는 버트런드 러셀을 끊임없이 치켜세우지만 그보다는 어쩌다 한 번 등장하는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더 눈길을 끈다.

그간 발행되어온 교양 철학 잡지 '뉴 필로소퍼'의 표지들.

그간 발행되어온 교양 철학 잡지 '뉴 필로소퍼'의 표지들.


신화의 핵심은 "문턱을 넘어서는 행위"다. 문턱 넘기란 쉽게 말해 "아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캄캄한 숲으로 들어서거나, 바다에 뛰어들어가거나, 사막을 가로지르는 일" 같은 것을 말한다. 숲, 바다, 사막을 지나 마침내 새로운 눈을 뜨는 게 신화의 기본 얼개 아니던가. 물론 캠벨은 "당신의 행복(Bliss)을 따라가세요"라는 문장을 "당신의 물집(Blister)을 따라가세요"라고 일부러 바꿔 쓸 정도의 현실 감각도 있다. 쉬운 행복은 없다.

경제학을 공부한 저자는 금융회사에 취직했다. 회사에서 별명은 '터치다운 토니'. 우락부락 저돌적으로 거래 상대에게 파고들어 메다꽂아버리는 힘이 느껴지는가. 지상의 비서가 보내주는 시시각각 변하는 일정을 비행기 안에서 받아가며, 거래 상대를 응대하기 위해 하루에 여러 잔의 커피와 식사를 해가며, 30초간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에도 상대방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방법을 연구해가며, 또 나 같은 사람에겐 어떤 벤츠가 더 잘 어울릴까 고민하며 살았다.

15년간 삶의 의미를 찾아 세계를 산보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에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곧 이 모든 걸 그만뒀다. 그리고 한국에는 산보(散步)라 번역된 플라뇌르(Flaneur)를 떠나기로 한다. 플라뇌르란 프랑스어로 '특별히 해야 할 일 없이 도시를 방랑'하는 걸 일컫는다. 프랑스에서 이는 "일종의 예술"이자 "철학적 스포츠"다.

휴대폰, 시계, 카메라 같은 문명의 이기들은 죄다 내버리고서는 에피쿠로스의 '행복의 기술' 같은 철학책, 사회학, 심리학 책만 잔뜩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아르헨티나, 칠레 등 남미를 거쳐 프랑스로, 스페인으로 쏘다녔다. 유일한 대원칙은 "계획을 세우지 말 것" 하나였다. 그 덕에 책은 일종의 여행기인데, 그럴듯한 사진 따윈 단 한 장도 없이 온갖 학자들의 밀도 높은 이야기들만 가득하다. 돈이 필요하면 현지에서 알바도 뛰면서 15년간 4명의 아이를 낳으며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 삶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었든·안토니아 케이스 지음, 김현수 옮김·위즈덤하우스 발행·372쪽·2만원

이 삶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었든·안토니아 케이스 지음, 김현수 옮김·위즈덤하우스 발행·372쪽·2만원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다 19세기 영국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과 E.P. 톰슨의 '시간, 근무기간, 산업자본주의'를 거론하기도 하고, 서양식 개인주의 비판을 위해 에드워드 슬링거랜드의 '애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를 끌어들이고, 동양의 무위(無爲) 개념을 따지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흐름(flow)' 얘기를 꺼내놓기도 한다. 그렇다고 '터치다운 토니'가 어디 가진 않았다. 나의 복잡미묘하고도 아름다운 내면을 배배 꼬아둔 문장으로 묘사하는 일 따윈 없다. 시원하고도 직설적이다.

책의 핵심은 결국 라이프 스타일이다. 쉽게 말해 '어떻게 살 것인가'다. 오늘날 철학은 복잡미묘한 추상적 말놀이에 가까워졌다지만, 고대 그리스 이래 철학의 원래 핵심 주제 또한 이것이었다. 저자가 가닿은 대답은 그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교양 철학 잡지의 창간이었다.

원제는 Flourish. 풍성한 꽃밭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번영(flourish)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만의 여정이다." 물론 물집은 좀 터질 것이다.

조태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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