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영남 광동 ②광저우 진가사당과 사만고진
도둑을 점잖게 양상군자(樑上君子)라 한다. 후한서 진식열전(陳寔列傳)에 나오는 고사다. 도둑이 들자 조용히 가족을 불러내 ‘배고프고 춥다 해서 도둑질하면 잘못이다’라고 훈계한다. ‘대들보에 숨은 군자’가 참회한다. 충과 효를 중시하는 냉정한 판결과 청렴한 관리로 알려진 진식은 서기 187년에 사망했다. 슬하에 아들이 여섯이었다. 진식을 시조로 하는 광동의 진씨 일족이 1,700여 년이 흐른 청나라 광서제 시대에 진가사당(陳家祠堂)을 세웠다.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사당이다.
국가급 보물만 3000여 점, 중국 최대 규모 진가사당
총면적이 2,448㎡ 규모다. 3개의 문을 지나고 동중서(東中西)로 3등분됐다. 삼진삼로(三進三路) 구조라 한다. 9개의 대청과 6개의 마당을 지닌 구청육원(九廳六院)이다. 대문은 가로 5칸, 세로 3칸 크기다. 진씨서원(陳氏書院) 현판이 걸렸다. 사당이자 회관이었으며 진씨 자제가 과거를 준비하던 장소였다. 지붕 위 용마루에 화려한 섬광이 비친다.
석회를 재료로 만든 회소(灰塑)로 꾸민 복록수(福祿壽) 그림이 만들어져 있다. 세 가지를 모두 누려야 가문이 오래 유지될 수 있다는 듯하다.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있다. 천년 소나무 우거지고 한 떨기 난초 향이 만발한 정원이라 자랑한다. 매화가 피어나 오복이 굴러들고 수목이 무성해 장수한다는 자부심도 있다. 위에는 점토로 건축물과 광동 무대극인 월극(粵劇) 배우와 관객을 배치했다. 인생은 유희와 같다는 뜻일까?
대문 양쪽 문신이 사당 품격에 맞게 기품 있고 위풍당당하다. 4m 높이의 대형 채색이다. 당 태종 이세민의 주요 공신이다. 붉은 얼굴의 진경은 왼손에 해머처럼 생긴 추를 잡고 있다. 검은 얼굴의 울지공은 오른손으로 도끼를 장착한 부를 잡고 있다. 이세민을 도와 전투에서 사용하던 무기와 사뭇 다르다. 활과 화살을 지니고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감히 귀신이라도 얼씬거리기 어려워 보인다.
영접문을 지나면 뜰이 나오고 본당인 취현당(聚賢堂)이 보인다. 단층 처마의 아담한 건축물로 5칸 크기다. 공을 들여 휘황찬란한 공예를 새긴 용마루에 시선이 간다. 재물과 평안을 상징하는 박쥐와 화병 6개가 양끝과 중간에 배치돼 있다. 사이사이에 공예로 채웠다. 왼쪽부터 보면 먼저 꽃과 새가 서로 어울리고 한 칸 건너면 소나무 옆에 노니는 사자, 기린, 사슴, 다람쥐다. 7명의 신선이 장수를 축하하는 장면이 딱 가운데다. 이어서 신화 동물인 기린과 사자가 등장한다.
오른쪽 끝에 이르면 화괴독점(花魁獨占) 글자가 있다. 꽃 중의 수괴인 매화가 만발하고 한 쌍의 새가 서로 바라보고 있다. 문장의 신을 괴성(魁星)이라 부르고 홀로 차지한다는 뜻이니 장원급제를 바라는 마음이다.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쓴 4편의 시도 있다. 이백의 ‘정야사(靜夜思)’가 또렷이 보인다.
우물 둔덕에 뿌리는 밝은 달빛 (牀前明月光),
맨땅에 켜켜이 솟는 서리 같네 (疑是地上霜)
머리 들고 창밖 달빛 바라보다 (擧頭望明月),
고개 숙여 고향 생각에 빠지네 (低頭思故鄕)
이백 정야사(靜夜思)
제사를 지내거나 회의를 열던 취현당이다. 취(聚) 자가 약간 이상하다. 가지다는 취(取)를 일(一) 하나의 획으로 묶은 모양도 재밌지만 아래가 색다르다. 나란히 선다는 음(乑)의 방향이 반대로 삐뚤어져 있다. 설명에 따르면 왼쪽 필적이 마치 칼(刀)로 보여 현인을 적대하는 방향을 회피하려는 뜻이라 한다. 고대부터 이와 비슷한 상황이 많았던 듯하다. 반대 방향으로 쓴 필법의 이체자가 간혹 보인다.
본당 앞에 계단으로 올라오는 월대가 있다. 기둥과 연결된 난간이 있고 곳곳에 망주두(望柱頭)를 설치했다. 양쪽에 석조로 조각한 사자가 노려보고 있다. 난간이 넓은 편이라 쟁반에 담긴 아열대 과일이 많다. 오렴자(楊桃), 파인애플(菠蘿), 천도복숭아(仙桃), 귤(橘子) 등이 보인다. 부처의 손바닥처럼 생긴 불수(佛手)도 있다. 진씨 자손이 영남 일대에서 생산되는 과일을 사시사철 조상에게 바치려는 마음이다.
가로와 세로로 80m에 이르는 규모다. 건축물을 서로 연결하는 복도를 연랑(連廊)이라 한다. 양쪽이 똑같은 길이의 조소공예로 뒤덮여 있다. 온갖 재료와 기술이 총동원됐다. 그야말로 광동민간공예박물관의 칭호가 아깝지 않다. 국가1급박물관의 자격도 있다. 공예 하나하나를 다 보물로 여기고 있으며 대략 2만여 건이라 한다. 국가급진귀문물도 3,000건에 이른다고 하니 놀랄 노자다. 어디 하나도 보물 아닌 공예가 없어 보인다.
가장 왼쪽(서쪽)에 있는 경기문(慶基門)으로 빠져나온다. 뒤쪽에도 회소로 꾸민 작품이 장착돼 있다. 별다른 이름이 없는데 산수화 비슷하다. 산과 길, 논밭과 과일, 채소도 보인다. 위쪽으로 등이 보인다. 앞문에서 보면 뒷모습이다. 지난 글에서 삼국지의 한 대목인 고성회(古城會)를 이야기했다. 바로 그 위에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있다. 왼발을 딛고 오른발은 들고 있는 모습이다. 진가사당 모든 지붕 위 뒷면에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핸드폰으로 사당 전경을 촬영했다. 꼭 다시 찾아와 구석구석 다시 살펴보리라는 다짐이다.
모래톱에 세운 800년 하씨집성촌, 사만고진
광저우 시내 남쪽 판위구에 800년 역사를 지닌 고진이 있다. 광저우남역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면 1시간 걸린다. 남송 시대부터 거주한 하씨(何氏) 집성촌인 사만고진(沙灣古鎮)이다. 얕은 바다였는데 간척으로 모래톱이 형성됐다. 네모 반듯하게 둑을 쌓은 사방당(四方塘)이 나온다. 대종사(大宗祠)가 반영돼 파란 하늘과 어울린다. 1275년 처음 건축했다고 하니 정말 오래됐다. 중건이나 보수도 많이 했다.
사당 앞에 비석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청나라 시대 과거에 통과한 인물을 기념한 진사비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비문을 읽어본다. 동치 2년인 1863년 수도에서 치르는 회시(會試)에서 115등으로 진사가 됐다. 동시에 황제가 주관하는 전시(殿試) 이갑(二甲)에서 28등을 기록했다. 일갑(一甲)에서 3명을 뽑고 1등이 장원이다. 2등은 방안, 3등은 탐화라 부른다. 칙명을 받들어 세운다는 흠점(欽點)도 있다. 주인공은 하문함이다.
붉은 바탕에 금빛으로 적은 하씨대종사 필체가 멋지다. 대문을 들어서니 시서세택(詩書世澤) 패방이 딱 붙어 있다. 북송 휘종 시대 하당, 하율, 하구 삼형제가 동시에 진사에 오른 경사를 칭송하기 위해 세웠다. 시경과 서경은 유교 경전이며 세택은 조상이 남겨준 은덕이다. 하가삼봉(何家三鳳)이라 불렀다. 뒤쪽에 후세에 남긴 가문의 영광을 뜻하는 삼봉유방(三鳳流芳)이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유경당(留耕堂)에 수많은 편액이 겹겹이 붙었다. 충효전가(忠孝傳家)가 중심을 잡고 문과나 무과를 통과한 진사가 나올 때마다 조상에게 보고했다. 명나라 개국과 함께 예부상서를 역임한 하기룡을 표창한 대종백(大宗伯)도 있다. 명나라 시대는 재상 없이 6부 장관인 상서가 운영했다. 제사와 의식을 관장하는 예부의 장관을 민간에서 대종백이라 불렀다. 기둥에도 명성을 기록한 문구가 줄줄이 내려가고 있다.
열린 대문에 두 명의 문신이 나타난다. 진가사당과 거의 비슷하다. 진경과 울지공 두 용맹한 무장이 문 하나씩 지키고 있으니 나쁜 기운이나 잡다한 귀신은 감히 근접하기 힘들다. 명나라 소설 서유기에서 이세민을 괴롭히는 용왕이 등장한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 황제를 괴롭히니 두 장군이 문을 지켰다. 중국 문신을 대표하지만 사용하는 사람 마음이니 가끔 다르다. 사만고진의 골목에 관우와 장비가 등장한다. 고대의 문신은 산해경에도 등장하는 신도(神荼)와 울루(鬱壘)다. 많이 보기 힘든데 한 민가에서 만났다.
종사 바로 옆에 도관인 옥허궁(玉虛宮)이 있다.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풍조우순(風調雨順)을 큼지막하게 적었다. 바다였던 간척지이니 바람과 비가 조용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북방의 신인 진무대제를 봉공한다. 음양의 교감과 만물의 변화를 관장하며 민간에서 수신(水神)이라 믿는다. 진무대제는 명나라 시대부터 백성의 신망을 받았다. 옥허궁은 명나라 시대에 처음 건축한 후 청나라 시대에 중건했다.
동으로 제작한 화로가 보인다. 마카오특별행정구 장관 허허우화가 재임 시절인 2003년에 기증했다. 현재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니 특별히 예우를 갖춰 중앙에 배치했다. 마카오 출생인데 매년 원적지를 찾아 사당에 참배한다. 사자 얼굴과 말발굽으로 다리를 지탱하고 파도치는 물결을 새겼다. 꼭대기에 공을 굴리는 사자 한 마리가 파도를 잠재우는 듯 서있다. 별칭인 현천상제(玄天上帝)와 품격을 맞춰 제작한 느낌이다. 바깥을 향하고 있는 사자의 시선을 따라 돌아서니 도관만이 아니라 마을을 지키려는 듯하다.
전설에 따르면 천상에는 모두 28개의 별자리가 있다. 동서남북마다 7개씩 차지하고 있다. 서한 시대의 회남자(淮南子) 기록을 보면 괴수인 현무(玄武)가 북방을 지킨다. 대제의 발이 현무인 거북을 밟고 있다. 병풍 같은 검은색 나무판자에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표시돼 있다. 북쪽은 온통 물의 신이니 마을의 처지에 걸맞다.
민간신앙을 이어오는 고진이다. 붉은 바탕에 금빛으로 쓰고 향꽂이가 놓였다. 토지복신(土地福神)에 대한 기원이다. 단체나 회사지만 땅의 신이란 뜻도 있는 사신(社神)이라 부른다. 토지를 관장하는 신이 복을 내려준다는 집념이다. 땅이 있으면 곧 재물이 있다(有土斯有財)고 믿기에 민간의 수호신이다. 길모퉁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았다. 토지공(土地公)과 토지파(土地婆)다.
진사리항(進士里巷)이 있다. 스승은 부채와 책을 들고 앉았고 학생은 꿇어앉았다. 벽화가 해학인지 교훈인지 모를 일이다. 골목 안에 살던 하자해가 명나라 초기인 1371년에 진사가 됐다. 800년 역사에 70명이 넘는 진사를 배출했다. 도시화 물결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된 마을이다. 영남의 남쪽 지방에 역사문화가 풍성한 마을이 있다니 놀랍다. 대도시 풍랑도 견디며 오래 지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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