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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Festina Lente(천천히 서둘러라)는 국내외 중앙은행이 앞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해 나가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한국은행이 30일 내놓은 보고서 결론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통화정책 기조를 긴축에서 완화로 전환하는 시기를 정할 때, 너무 이르면 물가 불안, 환율 변동성 확대, 가계부채 증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너무 늦을 경우 수출·내수 격차 확대와 금융시장 불안의 위험이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최적의 정책 전환 시기 결정은 ‘Festina Lente’란 격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 Festina Lente는 고대 그리스 격언으로 2,000년 전 로마제국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좌우명으로 삼으며 유명해졌다. 황제는 이 모순 어법의 격언을 ‘달팽이 껍데기에 뒷발을 넣은 토끼’나 ‘닻을 휘감은 돌고래’ 등으로 형상화해 금화에 새겨 보급했다. 황제가 좋아한 격언 중에는 “대담한 지휘관보다 안전한 지휘관이 낫다”도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이 격언을 동전에 새긴 이유는 ‘서둘러라’보다는 ‘천천히’를 더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 15세기 피렌체 공화국의 전성기를 연 코시모 데 메디치도 Festina Lent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는 ‘돛을 등에 진 거북이’로 형상화해 베키오 궁전 곳곳에 100여 개나 그려 넣었다. 부친 조반니의 유언인 “부자와 강자를 거스르지 말고, 빈자와 약자에게 자비로워라”를 평생 따른 그에게는 시기나 속도를 결정할 때보다는 강자와 약자 사이의 균형, 상충하는 요구를 넓게 포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격언이었을 것이다.
□ 오늘 한국에서 Festina Lente를 마음에 새겨야 할 곳이 어디 한국은행뿐일까. 30년간 고속 성장의 기반이 된 자유무역 체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앞선 주자는 달아났고 후발 주자는 등 뒤까지 쫓아온 기업들도 숨을 돌리고 되새겨 볼 만하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곳은 사상 최악의 충돌 우려가 제기되는 여의도와 용산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되 신중하게, 어떤 이견에서도 타협점을 찾는 균형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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