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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처, 첩, 그리고 일부일처제

입력
2024.06.05 19:00
수정
2024.06.07 10:05
21면
0 0
김선지
김선지작가

참 값비싼 불륜

게인즈버러 뒤퐁,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 1795년, 로열 컬렉션, 영국

게인즈버러 뒤퐁,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 1795년, 로열 컬렉션, 영국

요즘 우리 사회 유명 인사의 이른바 '세기의 이혼'이 뜨거운 이슈다. 이혼 재판 자체도 스캔들이지만, 값비싼 외도의 대가인 입이 떡 벌어지는 재산 분할액이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 같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막론하고, 정략결혼, 불륜, 첩과 조강지처에 관한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영국 하노버 왕조의 조지 4세와 그의 아내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의 불행한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위 작품은 18세기 영국의 화가 게인즈버러 뒤퐁(Gainsborough Dupont)이 그린 조지 4세의 왕비 캐롤라인의 초상화다. 조지 4세는 10대부터 술과 여자를 가까이했고 경마 도박에 엄청난 돈을 탕진하는 등 매우 방탕한 인물이었다. 빚 탕감을 조건으로 고종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딸 캐롤라인과 마지못해 정략 결혼했으나, 이때 이미 마리아 피츠허버트라는 여성과 사실혼 관계였다. 왕실 부부는 처음부터 서로에게 애정이 없었고, 이후 결혼생활도 원만하지 못했다. 결혼 직후 별거에 들어간 캐롤라인은 유럽을 떠돌며 지냈다. 야비하게도, 왕은 아내와 이혼하려고 그녀가 여러 명의 연인을 사귀고 혼외 자식을 낳았다며 공개 재판까지 열었다. 이때 800개 이상의 탄원서와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캐롤라인을 위한 서명에 참여했다. 결국 조지 4세의 이혼 시도는 실패했다.

불행한 아내였지만, 대중은 그녀의 편이었다. 영국 국민들은 그녀를 동정하고 왕의 불륜을 비난했다. 조지 4세가 아버지 조지 3세의 뒤를 이어 57세에 뒤늦게 왕이 되자, 캐롤라인은 왕비로서의 지위를 주장했지만, 왕은 대관식에도 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녀를 싫어했다. 조지 4세는 줄기차게 이혼을 요구했고 그녀는 계속 거부했다. 끝내는 이혼 법안까지 만들어 통과시키려 했지만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캐롤라인은 남편의 대관식에 참석하려다 실패한 후 건강이 악화돼 3주 후에 사망했다. 100㎏이 넘는 고도비만에다 각종 질병을 달고 산 조지 4세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도, 정부의 초상화를 자신의 관에 넣어 영원히 그녀와 함께 있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로서는 진정한 사랑이었던 모양이다.

조슈아 레이놀즈, '마리아 앤 피츠허버트', 1788년, 국립초상화미술관, 런던(왼쪽). 토마스 로렌스, '조지 4세의 초상', 1816년, 피나코테카 바티카나, 바티칸궁.

조슈아 레이놀즈, '마리아 앤 피츠허버트', 1788년, 국립초상화미술관, 런던(왼쪽). 토마스 로렌스, '조지 4세의 초상', 1816년, 피나코테카 바티카나, 바티칸궁.

문화권에 따라 예외는 있지만,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혼인제도는 일부일처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는 항상 혼외관계를 동반해 왔다. 특히 돈과 권력을 가진 남성은 공공연하게 축첩을 했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헤라 이야기는 힘 있는 남자, 조강지처, 정부들 간 삼각관계의 원형이다. 이러한 관계 구도는 현대사회에서도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오랜 가부장제 역사를 통하여, 남자들은 첩을 두었고, 본처는 질투와 고통을 감내하면서 결혼을 유지하고 제도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했으며, 여자들은 재산과 권력이 있는 남자들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했다.

결혼에 사랑이라는 낭만적 의미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였다. 그전까지 사랑은 결혼의 이유가 아니었고, 결혼이란 사회적 지위나 돈과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귀족계급이나 왕실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이득과 연관된 정략결혼을 했다. 현대에도 상류계층이나 재벌가를 중심으로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결혼이 이용된다. 예외도 있었지만, 애정 없이 이루어진 관계는 불행한 경우가 많았고, 배우자 중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혼이 거의 불가능하고 수치스럽게 여겨지던 시대에는 어떤 의미에서 혼외관계가 은밀하게 용인된 안전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법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일부일처제와 본처에 대한 지지를, 불륜과 간음, 첩이나 정부에 대한 혐오를 표방한다. 외도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불륜이란 단어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반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커플의 결혼이나 연애가 파탄에 이르렀을 때, 온라인상에서는 바람핀 쪽을 탓하고 그 외도 상대를 가정파괴범, 악마의 화신으로 보는 댓글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언제나 약자와 피해자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유명한 부부의 진흙탕 이혼 재판 과정에서 과거의 불법 비자금이 어떻게 한 기업에 흘러 들어갔는지 밝혀졌는데도, 사람들의 비난은 외도와 조강지처에 대한 배신에만 총집중되고 있다. 심지어 불법 특혜와 정경유착의 결과를 '은혜'로 호도한다. 일부일처제라는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점점 결혼에 대해 비우호적이며, 이혼율은 상승일로에 있다. 현재 서유럽과 북유럽을 중심으로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만 하는 비혼족이 하나의 시대적 트렌드가 되고 있으며, 동성 부부나 싱글 맘과 싱글 대디 등 가족 형태도 다채로워지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작가인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21세기 사전'에서 일부일처에 근거한 결혼제도는 곧 종말을 고하고, 점점 동거 형태로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일부일처제의 가치에만 초점을 맞춘 판결문은 판사나 법체계가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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