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 석유 시추 설익은 브리핑
기대치와 현실 수치는 다른 차원
장기 안목 필요하지만 벌써 정치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이 포항 영일만 시추 계획을 승인한 배경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유전 개발의 어려움과 리스크까지 담아냈다면, 이 소동이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140억 배럴’을 강조하며 "심해 광구로는 금세기 최대 석유 개발 사업으로 평가받는 남미 가이아나 광구의 110억 배럴보다도 더 많은 탐사자원량이다"는 윤 대통령의 언급이나 “현재 가치로 따지자면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 수준이다”는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계산법은 선을 넘고 말았다. 주가조작 세력의 발표를 닮았기 때문이다.
액트지오가 산정한 ‘최대 140억 배럴’은 상업성은 고사하고 개발과 발견 여부조차 검증되지 않은 단계의 기대치인 탐사자원량(prospective resources)이다. 반면 윤 대통령이 비교대상으로 거론한 가이아나 광구의 110억 배럴은 시추에 의해 발견되었고 기술적으로 회수 가능하고 상업성이 인정된 용어인 ‘매장량(Reserves)’이다. 몇십 년 뒤 포항 영일만에서 140억 배럴이 생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두 수치는 ‘기대’와 ‘현실’이란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는 숫자다.
이렇게 다른 차원의 수치를 교묘하게 엮는 게 주가조작 세력의 흔한 수법이다. 10여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CNK 주가조작 사건’ 당시 CNK 측은 개발권을 딴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의 추정 매장량이 4억2,000만 캐럿이라며 전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2.8배에 달한다고 홍보했다. 상업성이 검증되지 않은 추정ㆍ기대치와 현실 수치를 비교해 가짜 리얼리티를 부여하면서 주식 투자자들을 호객한 것이다. 특히나 외교부가 해당 업체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자료로 배포해 힘을 실은 게 결정적이었다. 이 업체의 주식은 5배 이상 뛰었다가 업체 대표 등이 차익을 챙겨 내다팔자 급락했다. 개인투자자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이 업체의 주장이 그렇다고 영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대학 교수의 탐사보고서에서 비롯된 추정치여서 1심은 업체 대표의 주가조작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고, 2심은 유죄로 판단하면서도 “개발사업의 실체 자체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추정ㆍ기대치와 현실을 비교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자원 개발 사업에서 책임 있는 당국자의 어법은 결코 아니다. 가이아나 광구의 경우 엑손모빌이 2008년부터 탐사를 시작한 후 7년 뒤인 2015년 시추를 통해 처음 상당 양의 석유를 발견했다고 발표하면서 조금씩 알려졌으나, 2015년 전에는 가이아나 유전에 대한 외신 기사 자체를 찾기 어렵다. 가이아나 유전은 2018년 8번째 시추에서 32억 배럴의 유정을 발견하는 ‘잭팟’을 터뜨리면서 전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된 시추작업으로 확보된 여러 유정의 매장량 합계가 110억 배럴인 것이다.
기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여러 험난한 장벽을 인내심 갖고 넘어야 한다. 영일만 유전이 발견되더라도 국제 유가가 하락하면 많은 비용이 드는 심해 유전의 상업적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반면 모두가 포기할 즈음, 기대 이상의 대박이 날 수도 있다. 이런 유의 사업엔 장기적이고 냉철한 안목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시추도 하기 전에 대통령과 장관이 장밋빛 계산법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주식시장을 투기판으로 만들고 말았다. 실패와 성공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수많은 투자자들이 투기 광풍에 휩쓸려 나갈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 재임 기간에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날지 불확실한데도 올 연말 착수하는 첫 번째 시추가 실패하면 정치적 논란이 더 거세질 게 뻔하다. 설익은 브리핑이 결과적으로 대왕고래가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질식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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