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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편일률 요양병원 임종 싫다"… 한국인 죽음의 질 높여야

입력
2024.06.25 13:00
수정
2024.06.27 10:0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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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운동·한국리서치 웰다잉 지표 개발
'원하는 방식 삶 마무리 가능' 24% 불과
집에서 편히 눈 감으려면 왕진 확대 필요
"수요 많은 호스피스 병동 늘려야" 의견도
원혜영 "존엄한 죽음 위한 다양한 방안을"

편집자주

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시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져요. 수고했다는 형제들 격려도 뿌듯하고요. 담도암에 걸려 병원에서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집에 모시지 못해 마음이 쓰였는데, 시어머니는 일상을 지냈던 익숙한 곳에서 돌아가셔서 마음이 놓였어요."

정영숙씨

정영숙(54)씨는 지난해 2월 16일 자택에서 시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다. 시아버지가 2021년 7월 갑자기 사망한 후 병세가 악화하자 큰며느리인 정씨가 시어머니를 돌보며 임종 순간까지 함께한 것이다. 정씨의 남편도 어머니가 요양병원보다는 자택에서 지내길 원했고, 시어머니도 편안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길 바랐다.

2017년쯤 경기 파주에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정영숙(오른쪽)씨가 시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시어머니는 첫째 며느리인 정씨에게 본인이 죽으면 '언니들이 있는 북한에 가까운' 이곳 성당의 봉안당에 안치해 달라고 얘기했다. 정영숙씨 제공

2017년쯤 경기 파주에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정영숙(오른쪽)씨가 시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시어머니는 첫째 며느리인 정씨에게 본인이 죽으면 '언니들이 있는 북한에 가까운' 이곳 성당의 봉안당에 안치해 달라고 얘기했다. 정영숙씨 제공

정씨는 자택에서 1년 7개월 동안 병시중을 했다. 시어머니가 보행 가능했던 기간은 419일(72%), 와상은 166일(28%)이었다. 와상 환자를 돌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대소변을 받는 것도 힘들었지만, 욕창이 가장 큰 문제였다. 시어머니에게 와상 생활 한 달 만에 욕창이 생기자 정씨 혼자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정씨가 왕진 의사를 알아봤다. 다행히 자택 인근에 왕진이 가능한 구리 느티나무 의원(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을 찾을 수 있었다. 김종희 원장은 2022년 10월을 시작으로 넉 달 동안 총 두 차례, 간호사는 여덟 차례 정씨 집을 방문했다. 대형 의료 장비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처치가 가능했다. 식염수를 이용해 욕창을 치료했고 필요에 따라 수액도 놨다.

정영숙씨가 시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설치한 발판. 정영숙씨 제공

정영숙씨가 시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설치한 발판. 정영숙씨 제공

하지만 시어머니는 임종 2주 전부터 가족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고 식사도 거부했다. 정씨 가족들은 어머니에게 콧줄을 끼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인위적 영양 공급으로 인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정영숙씨 시어머니 임종 후 텅 빈 방안을 찍은 모습. 정영숙씨 제공

정영숙씨 시어머니 임종 후 텅 빈 방안을 찍은 모습. 정영숙씨 제공

임종 이틀 전, 시어머니의 건강 상태는 급속히 악화해 산소포화도가 80% 밑으로 내려갔다. 정씨는 김 원장 추천에 따라 산소 발생기를 집에 설치해 산소포화도를 수시로 체크했다. 필요할 때마다 김 원장과 연락하며 시어머니 상태를 확인했다. 임종 당일 오전 9시 시어머니는 편안히 숨을 거뒀다. 정씨는 “임종이 다가오면 당황한 마음에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게 되는데 임종 순간까지 집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며 "왕진 서비스가 주로 수도권에서 가능한데, 지방에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좀 더 신경을 쓰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민 10명 중 2명 "원하는 방식 임종 가능"

죽음의 질을 높이려면 개인의 선택에 따라 임종 방식이 다양해져야 하고 죽음을 소중한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웰다잉문화운동·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2,015명을 대상으로 웰다잉 인식과 정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한국리서치와 웰다잉문화운동은 공동으로 국민인식조사를 실시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서비스 전수 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해 웰다잉 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우선 ①'거주 지역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는 24%에 그쳤다. 10명 중 2명만 원하는 방식으로 숨을 거둘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픽 = 김대훈 기자

그래픽 = 김대훈 기자

실제로 지난해 사망자를 장소별로 구분하면 의료기관이 75.4%로 압도적이고, 자택은 15.5%에 불과하다. 사망 장소가 보여주듯 한국인의 죽음은 천편일률적이다. 임종을 앞둔 노인들은 요양병원에 들어가거나 대학병원 중환자실을 전전한다. 정씨의 시어머니처럼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다 임종을 맞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왕진 서비스 필요하지만…

설문조사 결과 다양한 방식의 임종 욕구가 있지만 제도 홍보와 활용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②'자택 임종을 돕는 의사 왕진 서비스가 필요하느냐'는 질문에 74%가 '그렇다'고 답했지만, 해당 정책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 없다'는 응답자가 40%에 달했다.

그래픽 = 김대훈 기자

그래픽 = 김대훈 기자

정부는 2019년 말부터 방문진료 수가 시범사업을 통해 보행이 불편한 사람이면 누구나 왕진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2022년 말부터는 장기요양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도 추진해 현재 83개 의료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진료 수가가 낮고 홍보도 부족해 활용도는 높지 않다.

결국 한국에선 임종을 앞둔 노인 대부분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내몰리고 있다. 하지만 돌봄의 질이 높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인 부천시민의원 조규석 원장은 "노년에는 세심한 돌봄 서비스가 필요한데 지금은 각자도생하고 있다"며 "자식이 돌봐주지 않으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양질의 사회적 돌봄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 원장도 "존엄한 죽음을 위해선 임종을 앞둔 노인들이 무수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며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뿐 아니라 요양보호사·활동지원사까지 가족과 원팀이 돼야 고립에서 오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부천시민의원 조규석 원장이 지난 12일 경기 부천의 한 간암 말기 환자 자택에 방문해 진료하는 모습. 이 환자는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방문 진료를 신청해 영양 수액을 처방받았다. 이성원 기자

부천시민의원 조규석 원장이 지난 12일 경기 부천의 한 간암 말기 환자 자택에 방문해 진료하는 모습. 이 환자는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방문 진료를 신청해 영양 수액을 처방받았다. 이성원 기자


부천시민의원 조규석 원장이 지난 12일 경기 부천의 한 간암 말기 환자 자택에 방문해 진료하는 모습. 이 환자는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방문 진료를 신청해 영양 수액을 처방받았다. 이성원 기자

부천시민의원 조규석 원장이 지난 12일 경기 부천의 한 간암 말기 환자 자택에 방문해 진료하는 모습. 이 환자는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방문 진료를 신청해 영양 수액을 처방받았다. 이성원 기자

임종 관련 서비스 제공 기관의 지역별 분포에 차이가 큰 것도 문제로 꼽힌다. '건강 공동체'를 기치로 내걸고 방문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의 경우, 29곳 중 절반이 넘는 17곳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 한수연 웰다잉문화운동 사무국장은 “고령노인 비율과 지역별 요구를 반영해 죽음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서비스 제공 기준을 정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스피스 필요하다" 83%…호스피스 이용률은 21%

말기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한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에 대한 요구도 컸다. ③호스피스 정책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 83%는 필요하다고 답했고 68%는 이용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호스피스 이용률(2022년 기준)은 호스피스 대상 질환(암·후천성면역결핍증·만성 간경화·만성 호흡부전) 사망자의 21%에 그쳤다. 대상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는 9만6,619명인데 호스피스 병상(1,600개)은 2%에 불과한 탓이다. 실제로 국내 '빅5 대형병원' 가운데 입원형 호스피스 병동을 갖춘 곳은 서울성모병원이 유일하다. 영국의 호스피스 이용률(90% 이상)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래픽 = 김대훈 기자

그래픽 = 김대훈 기자


그래픽 = 김대훈 기자

그래픽 = 김대훈 기자

박중철 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 교수는 "의료진이 환자에게 말기암 진단을 내려도 호스피스 병동에 보낼 수 있으면, 환자는 의료진에게 버림받지 않았다고 느끼고 의료진도 죄책감을 덜 수 있다"며 "호스피스 병동이 없다면 의료진은 치유 가능성이 없는데도 환자를 퇴원시킬 수 없어 임종 직전까지 치료를 끌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의 죽음, 터놓고 얘기하자

죽음의 질이 낮은 근본적인 원인은 죽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웰다잉문화운동이 전국 280개 지자체의 웰다잉 관련 조례와 예산을 전수조사한 결과, △호스피스·완화의료 △연명의료 결정 제도 △장례문화 개선 △장기기증 △죽음 교육 등 웰다잉 문화 조성에 대한 다양한 지원 내용이 조례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조례와 예산을 모두 갖춘 지자체는 58곳(20.7%)에 불과했으며, 두 가지 모두 없는 지자체는 192곳(68.6%)에 달했다. 광역단체 중에선 광주광역시, 전남도, 전북특별자치도가 조례와 예산이 모두 없었다.

그래픽 = 김대훈 기자

그래픽 = 김대훈 기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6년 전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지만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많았다. 임종 직전 인공호흡기 등을 중단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생애 말기 돌봄에 대한 구체적 계획과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논의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죽음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사전 등록이며 임종에 대한 자기 결정을 확대하는 것”이라며 “가정과 지역사회 단위의 돌봄을 정착시켜 응급실에 가지 않고도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가 지난 1월 서울 중구의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하상윤 기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가 지난 1월 서울 중구의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하상윤 기자



이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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