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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치는 남자 부시는 여자

입력
2024.07.17 18:30
수정
2024.07.18 10:54
27면
0 0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한 남자가 그릇을 부시고 있다. 먹고 난 뒤 빈 그릇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갈무리하는 행동은 '부시다', '가시다'로 쓸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한 남자가 그릇을 부시고 있다. 먹고 난 뒤 빈 그릇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갈무리하는 행동은 '부시다', '가시다'로 쓸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시어머니의 말 그릇은 꽤 컸다. 내 딸들은 이따금 할머니 말에 놀라곤 했다. “아범, 어멈이 빨래를 널고 있으니 거실 바닥 좀 훔쳐.” 블록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할머니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모아 외쳤다. “할머니, 훔치는 건 나쁜 거예요.” 정의로운(?) 유치원생들은 씩씩대기까지 했다. 시어머니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연년생 손녀를 양 무릎에 앉히고 말했다. “옳거니!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물이나 먼지를 깨끗하게 닦는 것도 훔치는 거란다. 또 친구가 울면 눈물을 닦아 줘야 하잖아? 그것도 눈물을 훔치는 거란다.”

시어머니는 일하는 며느리가 안쓰러웠는지, 아들에게 집안일을 자주 시켰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 혼자 웃곤 했다. “밥을 제일 많이 먹은 아범이 빈 그릇을 부셔라.” 아이들은 할머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했다. “할머니, 그릇을 부수면 안 돼요. 깨진 유리에 발을 다쳐서 피가 날 수도 있어요.” 설거지에 익숙한 아이들이 ‘부시다’라는 말을 알 리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그 후로 ‘부시다’ 대신 ‘가시다’로 아들에게 설거지를 시켰다.

'부시다'와 '가시다'. 먹고 난 뒤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갈무리하는 행동을 뜻한다. 설거지, 뒷설거지와 같은 말이다. 이 중 ‘가시다’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으로도 잘 쓰인다. 명사형 ‘가심’이 더 익숙하겠다. 입안이 텁텁할 때 개운하게 헹구는 입가심, 숭늉 등 물을 머금어 볼 안을 씻어 내는 볼가심, 노엽거나 분한 마음을 씻어내는 부앗가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집가심’은 초상집에 한해 쓸 수 있다. 오래전 상여가 나간 뒤에 무당을 불러 집 안의 악한 기운을 깨끗이 가시도록 물리쳤던 일이 집가심이다. 뜻을 좀 더 넓혀 '집 청소'의 순우리말로 써도 참 좋겠다.

요즘 같은 장마철엔 '비설거지'를 잘해야 한다. 예보도 없이 갑자기 비가 내릴 때, 비를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고 덮는 일이 비설거지다. 마당에서 햇볕에 익어가는 간장·된장 항아리의 뚜껑을 덮고, 옥상 빨랫줄에 널어 둔 빨래를 걷고, 소쿠리에서 말라가는 고추와 작게 썬 무를 집 안으로 거둬들이는 일 등이다. 집 안을 환기하려고 열어 둔 창문을 닫는 일도 비설거지다.

시어머니는 하늘의 별이 되었지만 내 딸들의 말밭엔 할머니가 뿌려놓은 말들이 곱게 자라났다. 휴일 저녁, 밥을 먹고 나면 딸들은 말한다. "아빠, 우리가 그릇을 부실 테니 거실 바닥 좀 훔치세요. 훔치는 남자가 멋져요!"





노경아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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