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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분 잊은 막말과 집단행동... '의사 불신' 트라우마 입은 한국사회

입력
2024.07.30 13:0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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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에 선 K의료: ①분명해진 의료개혁 지향점]
의대 증원·의료 개혁 정책에 막말성 반발
환자마저 팽개치며 집단적 우월의식 표출
"성적지상주의·폐쇄적 문화로 일반과 괴리"
의사들 신뢰 회복 못하면 사회적 후유증 커

편집자주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와 의대 증원을 발표하며 의료개혁 기치를 올린 지 6개월. 의대 정원이 내년부터 대폭 늘어나 의사 인력 부족 해소의 전기가 마련됐지만, 전공의와 의대생의 이탈로 촉발된 의료공백은 의료체계를 보다 지속가능하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국내외 의료현장 취재와 전문가 자문을 통해 의료개혁 성공 조건과 보완 과제를 점검한다.


거친 언행으로 구설에 올랐던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장이 5월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한국 의료 사망선고 촛불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거친 언행으로 구설에 올랐던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장이 5월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한국 의료 사망선고 촛불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교도소에 갈 만큼 위험을 무릅쓸 중요한 환자는 없다."(임현택),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노환규), "지방에 부족한 건 의사가 아니라 민도."(주수호)

의사라면 자동 가입되는 법정단체인 대한의사협회(의협) 전현직 회장들이 이번 의정갈등 국면에서 한 말이다. 환자 보호의 본분마저 외면하고 집단적 우월 의식을 한껏 드러내는 발언들이었다. 의사가 늘어 필수의료·지역의료 공백을 해소하고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주길 바라는 여론을 아랑곳하지 않고 의사들은 병원을, 의대생은 강의실을 뛰쳐나와 저 거친 발언들은 빈말이 아니라고 시위했다.

의사에 대한 신뢰 상실. 의정 갈등이 수습돼 의료개혁이 본궤도에 오르더라도, 우리 사회 전반에 쉽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남을 거라는 게 의료계 안팎의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폐쇄적 공동체 문화, 성적 지상주의와 보상심리가 의사들을 보편적 인식이나 정서와 동떨어진 존재로 이끌고 있다고 진단했다. 의사 사회가 구성원 개개인의 성찰은 물론이고 직업군으로서 신뢰도와 이미지를 관리할 필요가 있고, 국가적으로도 의대생 선발부터 시작해 인성을 갖춘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게 이들의 제언이다.

상식과 동떨어진 발언 연발

2월 6일 의대 2,000명 증원안이 발표된 직후부터 의사 사회에선 엘리트주의와 선민의식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 이어졌다.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문과보다 공부 잘한 이과에서 1등 한 애들이 의사하는 것"이라며 "문과는 수학 포기한 바보들"이란 게시물이 올라왔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소아과 선생님 한 분이 용접을 배우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살기 싫다고 한다"는 글로 직업 비하 논란을 일으켰다.

상식을 벗어난 언사도 잇따랐다. 좌훈정 서울시의사회 부회장은 2월 용산 대통령실 앞 집회에서 보건복지부의 의대 증원 결정을 "데이트 몇 번 했다고 성폭력해도 된다는 말"이라고 비난했다. 주수호 전 의협 회장은 정부를 자식(환자)을 볼모로 폭력 행사하는 남편에, 의사는 자식 때문에 가출 못 하는 아내에 빗댔다.

6월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 붙은 전공의 이탈 관련 호소문. 연합뉴스

6월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 붙은 전공의 이탈 관련 호소문. 연합뉴스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정부가 의대 증원 정책을 발표하자 대형병원에서 중증·응급환자를 돌보며 수련을 받던 전공의 1만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사표를 내고 병원을 떠났다. 의대 교수와 개원의는 후배들을 꾸짖기는커녕 비호했고, 스스로도 직업윤리를 팽개친 집단행동에 가담했다. 의사들의 증원 반대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의정 대화를 거부하고 철저한 비타협으로 일관하는 행태에 공감하긴 힘들었다.

폐쇄적 공동체가 문제 "더 힘든 사람이 있는 걸 몰라"

의료계에선 의사 사회가 폐쇄적 문화와 집단의식 탓에 국민 정서와 괴리돼 있다고 지적했다. 의대에 입학하면 동기들과 모든 수업을 같이 듣고, 인적 교류도 의대 선후배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의대마다 인성교육을 강조하면서 인성 평가를 실시하거나(성균관대) 본과 실습 중에도 관련 과목을 의무 수강하게 하지만(서울대), 배타적 공동체 생활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기 쉽다는 것이다.

30년 차 의사 A씨는 "의사들이 생활하는 조건 자체가 당대의 호흡과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공의 시절을 포함해 노동 강도가 강하기 때문에 퇴근하고 책 한 권 읽을 시간도 없다"며 "이로 인해 세상 밖에 자신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른다"고 꼬집었다. 빅5 병원(5대 상급종합병원) 비의료직군 소속 직원은 "의대생 때부터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선배, 동기에게 낙인찍히는 걸 두려워하고, 잘못된 가치관도 한 번 전파되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성적 지상주의와 이로 인한 보상심리도 의사 집단문화를 이루는 요소로 지적된다. 한 지방의대 교수는 "현재 의대생에게 의대 증원은 공정의 문제"라며 "내가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의대에 들어왔는데 정원을 2,000명 늘려 손쉽게 의대에 들어오도록 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수능 성적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한 특권의식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의사들의 인성과 균형감각 함양을 촉구하면서도, 제도적으로 품성 좋은 의사를 길러내는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운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부산·경남 대표는 "현재 성적 위주의 방식에서 벗어나 의대생 선발 방식을 다양화해야 한다"며 "사교육을 통해 공부 잘하는 학생만 의대에 가는 구조에선 시민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의사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제언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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