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시작 45분 전 찬물로 샤워하고, 경기장에 들어설 때는 반드시 오른발부터 딛는다. 한 손에는 라켓, 다른 손에는 라켓 5개가 든 가방을 들고 코트에 입장한다. 벤치에 도착하면 관중석을 바라보고 점프하며 재킷을 벗고, 서브권 결정 순간에도 계속 제자리 점프를 한다. 서버가 결정이 나면 베이스라인까지 뛰어서 이동하고, 경기 중이 아니면 라인은 절대 밟지 않고, 항상 오른발로 넘는다. 코트를 바꿀 때와 휴식시간 후 벤치에서 일어날 때는 반드시 상대보다 늦게 일어난다.
‘흙신’으로 불리는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스페인)이 20여 년 동안 경기 전 빼놓지 않고 하는 ‘루틴’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경기가 시작되면 그의 행동은 더욱 산만해진다. 발로 서브 라인을 닦은 뒤 라켓으로 왼발과 오른발을 한 번씩 친다. 그다음엔 바지 엉덩이 쪽을 잡아당긴 뒤 오른쪽과 왼쪽 상의 옷깃을 번갈아 만진다. 이어 손으로 코, 왼쪽 귀, 다시 코, 오른쪽 귀 순으로 만져야 서브를 넣을 준비가 끝난다. 매 포인트가 끝나면 수건으로 얼굴(코와 귀 포함)을 닦고, 휴식 중에는 음료수 병 상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코트를 향하도록 세워 둔다. 양말 길이도 똑같이 맞춰 올려야 한다. 서브 루틴을 한 가지로 친다면 그의 루틴은 모두 12가지나 된다.
‘루틴’의 사전적 의미는 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을 뜻한다. 하지만 스포츠 선수들에게 루틴은 단순하게 일의 순서라기보다는 승리를 부르는 특별한 ‘주문’과도 같다.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정해진 순서대로 몸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온 우주의 티끌 하나라도 모아서 이기고 싶은 게 선수들의 마음이다. 특정 행동·동작을 반복하는 루틴을 해야 심리적 안정감을 찾고 경기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는 태극전사들도 승리를 부르는 그들만의 특별한 주문을 가지고 파리로 향했다.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 후보인 안세영은 경기 전 신발 끈이 꼬여 있는지 꼭 확인하고, 아티스틱스위밍의 이리영은 콘택트렌즈를 왼쪽부터 착용한다.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30㎏급 이승찬은 빨간 팬티를 입고, 사격 10m 공기권총에 출전하는 이원호는 시합할 때만 입는 속옷이 따로 있다고 한다. 수영 김우민은 출발대에 오르기 전 박수를 친다.
파리의 열전이 이제 막 시작됐다. 한국 선수단은 21개 종목 143명으로, 1976년 몬트리올 대회(50명) 이후 최소 규모다. 선수단 규모만큼 메달 목표도 줄어 금메달 5개, 종합 순위 15위다. 이 역시 몬트리올 대회 이후 가장 낮다.
하지만 스포츠는 반전과 기적의 드라마다. 암울한 전망에도 선수들은 작은 희망의 실마리도 놓지 않고 있다. 한국은 펜싱 오상욱이 남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개막 첫날 금·은·동메달을 따내는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여자 핸드볼은 강호 독일을 꺾는 기적을 연출했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시작이었지만 결국 대한민국 선수들은 피 땀 눈물로 만든 감동적인 드라마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여기에 더해 자신만의 ‘승리 패턴’을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들 눈에는 사소해 보이는 루틴까지 빼놓지 않고 챙기며 지금 이 순간에도 승리를 위한 주문을 하고 있을 대한민국 모든 선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열정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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