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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영과 허빙자오가 세상을 바꾼다

입력
2024.08.09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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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영과 허빙자오. 허빙자오가 오른 손에 든 것이 스페인대표팀 배지다.

안세영과 허빙자오. 허빙자오가 오른 손에 든 것이 스페인대표팀 배지다.

'신이 지구를 포맷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가끔 한다. 구제불능의 인류를 포기한 나머지 절멸시키겠다고 절대자가 작정한 게 아니라면 세상이 요즘처럼 총체적으로 나빠질 리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 같이 망하자"는 말이 입에 붙어버린 내가 입조심을 결심한 건 파리 올림픽에서 뛰는 선수들을 보면서다. 사람 한 명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지만 인류는 고쳐 쓸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됐다.

치사하게 이기기와 지저분하게 지기. 승자독식에 취하고 무한경쟁에 마비된 사회에선 그다지 부끄러운 행동도 아니지만, 젊은 선수들은 달랐다. 치사해지거나 지저분해지는 것을 거부했다.

이기는 게 전부가 아니란 것을 선수들은 알았다. 배트민턴 단식 은메달을 딴 중국의 허빙자오는 스페인대표팀 배지를 들고 시상대에 올랐다. 준결승전 중에 다쳐서 자신에게 기권승을 안긴 스페인의 카롤리나 마린을 위해서였다. 허빙자오는 '나에게 져서 울고 있을 타인'을 잊지 않았고, 그의 아픔에 마음을 포갰다. 양궁 개인전 준결승에서 승리한 임시현은 패배하고 퇴장하는 전훈영을 불러세웠다. 전훈영의 손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전훈영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전훈영이 흘린 땀을 임시현은 기억하고 기렸다. 이들처럼 패자와 공감하는 인류, 결과가 과정을 지워선 안 된다고 믿는 인류가 만드는 세상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패배를 품위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선수들은 알았다. 미국의 기계체조 영웅 시몬 바일스가 마루운동 금메달을 놓친 건 이변이었다. 은메달 시상대에 선 바일스는 금메달 시상대에 오른 브라질의 레베카 안드라데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했다. 탁구 단식 동메달 결정전에서 진 신유빈은 일본의 하야타 히나에게 먼저 다가가 승리를 축하했다. 그리고 나서야 눈물을 흘렸다.

바일스와 신유빈이 승부를 우습게 봤을 리 없다. 이들은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았기에 의연했다. 주종목인 25m 사격 결승에 가지 못한 김예지의 말에 선수들의 생각이 압축돼 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게 아니다. 올림픽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다. 다시 시작하고 도전하면 된다." 인생의 기회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류가 만드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시몬 바일스(왼쪽)가 레베카 안드라데의 우승을 축하하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파리 AFP=연합뉴스

시몬 바일스(왼쪽)가 레베카 안드라데의 우승을 축하하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파리 AFP=연합뉴스

'집단의 이름으로 까라면 까기'와 '까기 싫으면 조용히 하기'가 생존 비기로 통하는 한국 사회에 안세영이 돌을 던졌다. 금방 딴 금메달의 무게에 실어 던진 돌이라 충격이 대포급이었다. 그는 스스로 부조리하다고 확신한 거대한 존재에 싸움을 걸기 위해 전략을 세울 줄 알았다. 분노를 힘으로 바꾸며 기다렸다고 했다. 힘이 있어야 발언권이 생기는 현실은 가혹하지만, 그 현실을 모르고는 현실을 바꿀 수도 없다. 그 비정함을 일찍부터 깨우치고 영리하게 싸우는 인류가 만드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안세영의 싸움이 어떤 결말을 맺든, 그의 패기를 싸잡아 폄하하지 말았으면 한다. 균열을 내지 않으면 세상은 내내 이 모양 이 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내일보다 젊습니다. 계속 도전하세요."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룩셈부르크의 61세 탁구 선수 니시아리안의 말이다. 허빙자오, 임시현, 시몬 바일스, 신유빈, 김예지, 안세영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내일의 인류는 오늘보다 건강하고 똑똑하겠네요. 그러니 더 나은 세상을 계속 희망합시다."


최문선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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