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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도 처형의 사유도 뚜렷하지 않은 시인의 죽음

입력
2024.08.1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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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20세기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죽음의 진실은 지금도 의문 속에 남겨져 있다. humanidades.com

20세기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죽음의 진실은 지금도 의문 속에 남겨져 있다. humanidades.com

스페인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Pederico Garcia Lorca)가 1936년 8월 19일, 알려진바 고향인 남부 그라나다의 베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극우파 경찰이 포함된 6명의 사형 집행인에 의해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투우사와 교사 등 공화파로 낙인찍힌 2명과 함께 희생된 그는 총살되기 전 자신들이 묻힐 무덤을 직접 파야 했다는 설이 있다. 그의 무덤은 사학자와 논픽션 작가 등 다수의 추정을 근거로 여러 차례 발굴이 시도됐지만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고, 심지어 처형당한 실제 이유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로르카는 이슬람교 지배의 흔적이 짙게 남은, 또 그래서 15세기 레콩키스타 이후 가톨릭 영향력이 성하던 안달루시아 지역 토박이였다. 지주였던 아버지의 강요로 예수회 학교를 거쳐 마드리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교사 어머니에게서 익힌 피아노 연주와 작곡 등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예술에 심취했고, 특히 대학 시절부터 시와 희곡 등 문학에 몰두했다. 1919년 마드리드 국립대에 진학한 뒤 한때 연인이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 등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유했고, 달리가 꾸민 무대에서 공연한 연극 등으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지주-가톨릭 중심의 억압적 전근대성을 혐오하던 그는 1936년 정교분리와 토지개혁을 앞세운 좌파 인민전선 정부를 환영했다. 하지만 그해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내전이 시작됐다. 그는 고향 그라나다로 피신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극우파 반군에 의해 체포됐다. 내전 극우파가 그를 체포-처형할 만한 이유는 그의 성정체성과 문학을 통한 집시 민족의 옹호, 공화파 동조 등 무척 많다. 하지만 그가 우파 민족주의자들과도 썩 잘 지냈던 점에 주목하는 이들은 사적인 동기, 즉 지역 토지 이권 등을 둘러싼 가문 간 알력이 주된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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