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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할아버지의 재력 ②엄마의 정보력 ③아빠의 무관심. 자녀의 대학 입시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며, 대략 2000년대 후반부터 사교육계를 떠돌던 우스갯소리다. 그런데 이 조건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시의 성패가 최소 두 세대(조부모→부모→자녀)에 걸친 '부의 세습'과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학군지라는 곳에 진입하기 위한 주거비와 매달 투입되는 사교육비는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이며, 때로 부모 중 한 쪽은 10년 이상 지속되는 사교육 레이스를 자녀와 온전히 함께 뛰기 위해 생업까지도 포기한다. 위 세 가지 조건은 이런 세계를 버틸 수 있는 부모 또는 조부모의 자본과 소득이 입시 성공의 선결 조건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자녀의 학업 성취도와 부모의 경제력이 높은 상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연구와 통계를 통해 여러 번 입증됐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하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학생 절반 이상이 연소득 1억 원 이상의 고소득 가구의 자녀라는 사실은 매년 국회 국정감사의 단골 소재다. 명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나 의과대학의 장학금 신청자 중 고소득 가구 자녀 비율은 더 높다. 능력 있고 교육열이 높은 부모를 둔, 고로 남보다 더 질 좋은 사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있는 집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제 거의 반박이 어려운 명제에 가깝다.
최근 서울대가 재학생 부모들에게 배부한 가족 차량 스티커가 논란이 되자, 혹자는 이를 "천박한 계급주의"라고 일갈했다.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행태"라고 비판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까지 제기했다.
그런데 서울대생 학부모들의 자식 자랑 스티커는 이들의 지적처럼 서울대의 위력을 과시하거나,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명문대 학생 스스로가 소속감을 높이거나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기 위해 학교 점퍼를 착용하거나 굿즈(기념품)를 쓰는 것과도 결이 다르다. 서울대 마크와 함께 쓰인 '자랑스러운 가족', '자랑스러운 부모'라는 영어 문구는 자녀의 서울대 진학이 가족이 함께 뛴 '팀 플레이'의 결과였음을 상징한다. 부모들에게 이 스티커는 자녀를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 긴 시간 막대한 원조를 쏟아부은 노고를 드러내는 표식이다.
부모로서 자녀가 서울대에 진학한 사실이 충분히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성과가 오로지 자녀 개인의 우수한 학습 능력과 성실함 및 끈기에서 비롯됐다면 부모까지 이렇게 나서서 과시하려 할까. '내 자식이 서울대에 다닌다'는 문구를 차량에 붙여 사방을 다니는 행위는 차라리 '우리 가족은 이렇게나 힘이 세다'라는 무언의 구별 짓기에 가깝다.
우리는 이런 가족들에게 익숙하다. 어떻게든 자녀들을 명문대에 보내려 안간힘을 쓴 어느 정치인이나 공직 후보자들, 학벌이 전혀 중요치 않은 업계에 종사하며 온 가족의 서울대 졸업장을 자랑하는 방송인도 있다. '가족의 힘'으로 학벌과 부를 세습한 것이 이들에겐 외려 자랑거리다. 이런 가족들이 그렇지 못한 가족들에게 주는 박탈감은 서울대를 다니거나 졸업한 개인이 주는 박탈감보다 훨씬 크다. 이런 논란조차 예상하지 못한 서울대나, 논란을 열등감의 발로로 치부하는 서울대 구성원들에게 유감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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