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대학을 졸업하고 온 충무로는 돈 버는 곳이 아니었다. 제작부 일원으로 촬영을 앞두고 영화사에 출근하면 모두가 도시락을 싸 왔다. 영화사가 점심을 챙겨주지 않았으니까. 대기업들이 영화판에 들어오고, ‘쉬리’(1999)가 흥행한 후 많은 게 바뀌었다. 영화사들이 점심을 주기 시작했고, 영화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얼마 전 만난 한 중견 감독의 말이다. 그는 2000년 직전까지도 영세했던 한국 영화산업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의 회상대로 한국 영화는 2000년을 전후로 비상했다. 멀티플렉스 체인이 전국 곳곳에 들어섰고, 신진 감독들이 쏟아졌다. ‘실미도’(2003)와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1,000만 영화 시대를 열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사업 모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스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스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대작은 흥행 실패 가능성이 작았다. 영화판의 ‘대마불사’였다.
한국 영화 산업 고도화는 여름 시장이라는 ‘상품’을 만들기도 했다. ‘괴물’(2006)이 1,301만 명을 모으며 당시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한 후 영화사들은 주요 화제작들을 여름에 집중 배치했다. 시원하고 볼거리가 넘쳐나는 극장은 도심 피서지로 떠올랐다. 명절과 연말 대목을 제치고 여름이 최고 성수기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많은 걸 바꿔놓았다. 극장 관객은 줄었고, 여름 시장 흥행 열기는 시들었다. 2022년과 지난해 실망스러운 박스오피스 결과는 여름 시장을 달리 보게 했다. 올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한국 영화들이 여름 극장가를 찾은 이유다.
올여름 한국 영화 흥행 성적표는 나쁘지 않다. 최고 흥행작인 ‘파일럿’은 22일까지 403만 명을 모으며 수익을 남기고 있다. ‘탈주’(255만 명)와 ‘핸섬 가이즈’(177만 명) 역시 돈을 벌었다. 지난해 여름 극장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긴 한국 영화가 ‘밀수’(514만 명) 한 편이었던 걸 감안하면 선전한 셈이다.
‘파일럿‘과 ’탈주‘는 제작비가 100억 원가량으로 알려졌다. ‘핸섬 가이즈’는 49억 원이다. 중급 영화로 분류될 규모들이다. ’파일럿‘과 ’탈주‘는 220만 명 정도, ’핸섬 가이즈‘는 120만 명가량이면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관객들을 즐겁게 할 요소들을 각각 지닌 영화들이라고 하나 적은 제작비가 ‘흑자’의 큰 요인이었다. ‘파일럿’과 ‘핸섬 가이즈’가 거창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시도 대신 웃음 전달에 방점을 찍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올여름 시장이 영화계에 시사하는 점은 적지 않다. ‘별’들이 아무리 많이 출연해도 별 볼 일 없는 대작은 이제 살아남을 수 없다. 제작비를 줄이고, 확실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영화들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더 늘어날 듯하다. 코미디나 공포, 액션 등 한 가지 특질을 확실히 내세운 장르 영화 제작이 이어질 전망이다.
문제는 제작비를 어찌 줄이냐다. 스타 배우 몸값을 깎기는 쉽지 않다. 될성부른 신인 배우 발굴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몇몇 제작자들이 40세 이상 남자 배우를 캐스팅 않기로 담합했다는 풍문이 떠돌 정도로 새 얼굴 찾기는 이미 영화계의 화두가 됐다. 한국 영화는 당분간 축소지향이 될 수 밖에 없다. 코로나19가 부른 영화계 뉴 노멀은 어쩌면 이제야 시작된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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