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 가기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30대 의사입니다. 낮은 자존감과 우울증, 대인기피증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몇 년 전 결혼하고 잠시 호전되는 듯했는데, 얼마 전 아이를 낳은 뒤 다시 심해졌어요.
저는 감정기복이 심합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을 오가며 위선적인 면도 있습니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겪고 있다는 걸 주위에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늘 밝고 활발한 척해서 지인들은 저를 매사에 열정이 넘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은 무척 가정적이고 화목한 분들입니다. 회사원인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이긴 했지만 가정을 무척 사랑했고 치열하게 가정을 위해 사셨어요. 주부인 어머니는 가정적이며 여성스러운 분입니다. 그래서 상담을 받을 때마다 괴로웠어요. 유년기가 어땠는지, 부모와 관계가 어땠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제 문제의 원인을 부모님에게서 찾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어 상담을 중단하곤 했습니다.
굳이 부모님에게서 문제를 찾는다면, 제가 상처를 받으면 부모님은 더 상처를 받고는 하셨습니다. 친구와 싸웠다고 말씀드리면 두 분은 잠을 못 주무실 만큼 걱정을 하셨는데, 그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늘 사랑받고,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어 했어요. 중·고교 시절엔 성적에 집착했고, 대학생 때는 체중과 외모에 대한 강박에 시달렸어요. 원하는 체중에 이를 때까지 음식을 끊고 학교에도 가지 않은 채 운동에 집착했죠. 남들은 그런 저를 대단하고 멋지다고 칭찬해 줬어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한없이 무기력해지기도 했어요. 결국 내가 바라는 건 내가 어떤 모습이든 사람들과 편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어떤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남편과 부모님이 잘 도와주는 덕분에 육아는 그다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출산 이후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저 스스로를 망치고 있어요. 자기관리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여전히 저를 좋아해 줍니다. 막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헛웃음이 나옵니다. 어릴 때는 1, 2㎏만 체중이 늘어도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4년 전 남편을 만난 뒤 극도의 대인기피증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뭘 하든 칭찬하고 지지해 줘서 처음으로 안정되고 자존감 높은 시간을 보냈어요. 남편은 자존감이 높고 긍정적인 사람이라서 함께 지내면서 저도 치료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다툼이 잦아졌고 싸울 때마다 제가 남편을 무시하는 막말을 쏟아내곤 했어요. 책으로 공부한 ‘건강한 관계 만드는 방법’ ‘행복한 부부생활 비법’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저는 3, 4년 주기로 정신과와 상담센터를 전전하고 있습니다. 매번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상담을 중단하고 그럭저럭 호전된 채로 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같은 고민을 하는 제가 너무 한심해요. 저를 둘러싼 현실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저는 여전히 알코올중독, 섭식장애, 불안감으로 괴롭습니다. 괴물 같은 제 모습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 두렵습니다. 저처럼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까요.
한규리(가명∙36∙의사)
사연을 읽으며 그동안 규리씨가 감당했을 자기 이미지에 대한 높은 기대감과 압박감이 느껴져 가슴이 아팠습니다. 규리씨는 내면에서 많은 갈등을 느끼는 듯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남편도 좋은 사람이고 직업도 안정적이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만, 내면에서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네요.
제가 눈여겨보는 건 규리씨가 자신의 주변을 굉장히 이상화한다는 점입니다. 가족을 소개할 때도 좋은 식으로만 표현해요.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란 없는데 마치 완벽한 것처럼 묘사를 하는 거죠. 이는 규리씨가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는 느낌과 복잡한 감정을 경험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완벽하지 않아서 불안하니 주변 사람들이 다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안정감을 가지려 하는 겁니다. 또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느니 외부 상황에 대해 다 괜찮다며 이상화하는 것이 차라리 편한 것입니다. 삶이란 원래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가 안 될 수도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규리씨는 삶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려는 것이죠. 성적에 집착하고 외모를 가꾸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삶이란 그런 식으로 통제될 수 없어요. 통제가 된다고 해서 궁극적인 안정감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점차 자각하게 됐을 겁니다.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쓰이는 방어기제가 이상화입니다. 내가 맺는 중요한 관계를 모두 이상화해야만 내가 보호받을 수 있고 통제 가능한 환경에 있다고 안심할 수 있으니까요. 완벽주의나 이상적인 신체 이미지에 집착하는 섭식장애도 그런 경우에 많이 생깁니다.
규리씨는 “굳이 문제를 찾는다면”이라면서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이 밤에 잠을 못 들 정도로 걱정하셨다고 했어요. 사소한 일이라고 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불안한 부모의 과잉반응은 학대나 방치 못지않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얘기로 두 분이 잠 못 들고 걱정하실 정도였다면 규리씨는 부모님께 또다시 부담을 드릴까 봐 그 후로는 그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자신의 문제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거나 내면화하려 했을 거예요.
감정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건강하게 표현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결국 감정 조절 능력을 잃고 쌓인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규리씨가 남편한테 폭언을 하는 것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어요. 육아는 부모로 하여금 매우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또 부모가 되기 전에 겪은 다른 일들과는 달리 통제가 쉽지 않아 불안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부모로서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다가 엉뚱한 데서 터트리게 되죠.
규리씨에게 또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반의존적인 독립성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의존성이라고도 합니다. 의존성이란 타인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을 밀접하게 여기고 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부모가 자녀 문제에 너무 깊게 관여하고 과잉 반응을 하면 성장 과정에서 독립성보다 의존성이 더 커집니다. 겉에서 보면 자녀가 스스로 할 일을 잘하고 독립적인 성인으로 자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부모에게 충분히 의존할 수 없어서 그런 척하는 것뿐이죠. 그럴수록 자녀의 내면에선 결핍된 의존 욕구가 더욱 커지게 되고요.
상담 과정에서 부모를 탓하면 안 된다, 부모를 배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상담이 어려워집니다. 상담이 잘 진행되려면 과거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데, 그 지점에서 저항이 생겨 진척을 보지 못하는 거죠. 그런 저항에서 벗어나 상담을 꾸준히 하면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을 찾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과거의 경험들이 기억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장 과정의 기억은 왜곡된 것이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 감정을 부정하고 과거의 사실도 부정하면서 아무 문제 없는 척하는 방어기제는 상담에서 자기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을 막습니다.
규리씨가 어렵더라도 상담을 꾸준히 받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말한 저항의 마음까지 상담자에게 진솔하게 털어놓아 보세요.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규리씨는 부모님께 온전히 의지하지 못했기에 상담자를 의지하기 어렵고 끊임없이 의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상담자에게 규리씨를 맡기고 마음을 연다면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진정한 편안함이 찾아오면서 왜곡되거나 지워졌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를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규리씨의 감정도 더 잘 인식될 거예요. 생각보다 이상적이지 않은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게 괴로워서 또 상담을 그만두고 싶어지면, 상담자에게 그런 마음도 열어서 보여주세요. 상담자가 수위와 속도를 조절하면서 상담을 진행해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모에 대한 양가감정이 자연스럽게 통합되고, 지금 겪는 마음의 고통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철두철미한 인간관계를 고집하다 보면 대인관계가 불편하고 어색해집니다.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으려면 서로 감정을 자연스럽게 소통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괜찮은 척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 하면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을 수 없어요.
다행히 규리씨 주위에는 규리씨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 보이네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해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다만 충동적으로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좋지 않아요. 우선은 규리씨 감정이 차분한 상태일 때 소소한 감정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조금씩 표현해보세요. 아이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부부가 공유하는 건 육아는 물론 부부관계에도 도움이 됩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수많은 감정을 하나씩 적어 보는 감정일기 쓰기도 추천드립니다. 평소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지 않았던 사람도 아이를 키우면서는 ‘좋은 엄마’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쌓였다가 터지면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 감정을 평소에 조금씩 풀어내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규리씨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좀 더 열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스스로에 대한 마음의 문부터 열어야 합니다. 타인에게 자연스럽게 자신을 보여주고 소통하다 보면 관계도 편해지고 자존감도 높아질 겁니다. 자녀 양육에도 도움이 되고요. 규리씨가 자기 감정을 잘 보살피면서 주위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를 맺으며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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