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트럼프와 해리스의 ‘건곤일척’ 대결의 흐름을 미국 내부의 고유한 시각과 키워드로 점검한다.
<2> 미국의 정치9단, 낸시 펠로시
美 민주당 살려낸 막후 조정자
서부서 성공한 동부 가문 여성
해리스 옹립으로 영향력 과시
지난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마지막 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 머리 위로 풍선과 색종이가 쏟아졌다. 그 순간 단상 바로 앞에서, 한 달 전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을 실현시킨 한 정치인도 함께 박수를 쳤다. 하원의장을 두 번이나 지냈으며, 바이든 대통령보다 세 살이나 많은 낸시 펠로시(84)였다.
불과 5주 전, 바이든 대통령의 재앙적인 첫 대선 토론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암살 시도 극복으로 민주당의 대선 전망과 해리스 부통령의 미래는 극히 암담했다. 이때 민주당 지지자들의 요구에 호응, 바이든 대통령 후보 사퇴에 총대를 멘 인물은 버락 오바마와 빌 클린턴 등 민주당 대부(代父)급 원로도 현재의 상원과 하원 지도자도 아니었다. 바로 펠로시였다.
5명의 자녀를 모두 키운 후에야 선출직 공무원이 된, 지금은 공식 직책도 없는 이 작고 부드러운 말투의 여성이 어떻게 현직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을 주저앉힐 수 있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그의 피 속에 정치적 능력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펠로시의 부친 토머스 달레산드로 주니어는 총 20년 동안 미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5선 의원과 시장을 지냈다. 5명의 오빠를 둔 6남매의 막내 펠로시는 어릴 때부터 정치의 예술을 배웠다. 그도 아버지의 선거운동 봉투에 내용물을 넣거나, 아버지가 공직 선서할 때 성경을 들고 있던 어린 시절 기억을 종종 회상하곤 했다. 펠로시의 어린 시절 볼티모어의 정치 지형은 미 동부의 전형적인 대도시와 유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흑인 투표율과 시민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영향력은 크게 위축됐다.
펠로시는 1963년 결혼과 동시에 미 서부로 옮겨갔는데, 정치 가문의 외동딸로 터득한 것까지 잃지는 않았다. 47세가 되었을 때(1987년) 전임자가 암에 걸리면서 실시된 보궐 선거에서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에 선출됐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꿈과 정책을 실험하는 피난처였으며, 미국 동부의 거칠고 살벌한 정치와는 달랐다. 펠로시는 바뀐 정치 환경 속에서 꾸준히 성장, 2002년에는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됐다. 미국 연방 하원이나 상원에서 여성이 원내대표가 된 건 그가 처음이었다.
펠로시가 다른 정치인과 확실히 구별되는 점은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이나 8년 사이에 두 번이나 하원의장을 지냈다는 게 아니다. 20년 동안 원내대표를 지내며 하원에서 민주당을 이끈 게 더 돋보인다. 이는 미국 역사상 하원과 상원을 통틀어, 샘 레이번을 제외하면 오직 그만이 이룬 놀라운 업적이다. 펠로시가 20년 동안 원내 사령탑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정치자금 모금에 탁월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에서 돈은 게임의 핵심인데, 펠로시는 민주당 진영에서 그 누구보다 정치자금 모금에 뛰어났다. 그는 선거에 필요한 기부금을 조성해주는 대가로 다수의 정치적 동지와 결정적 순간 자신을 지지하는 표를 확보했다.
펠로시는 정치적 은퇴도 명예로웠다. 젊고 패기 있는 젊은 세대의 도전을 받았을 때 펠로시는 대부분의 장기 집권자들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공화당의) 케빈 매카시는 지난해 반대자들과 타협한 뒤, 의장 권력을 약화시켜 가며 자리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펠로시는 그러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퇴장하면서 민주당의 진보적 진영과 적절히 거래를 했고, 그 결과 매카시처럼 쿠데타 방식으로 쫓겨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필자를 포함한 여러 전문가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힐러리 클린턴을 물리친 2016년 대선 이후, 트럼프가 공화당은 물론이고 사실상 민주당의 지도자였다고 믿어왔다. 트럼프가 민주당의 특정 대응을 유발하는 가장 큰 동기부여자였기 때문이다. 트럼프라는 이름만으로도 민주당 지자자들은 정치자금 모금, 유권자 등록 및 적극 투표에 나섰고, 당내 의견 차이 해소에도 효과적이었다. 그 누구의 연설이나 리더십도 트럼프만큼 민주당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트럼프를 민주당의 '최대 행위 유발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당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지 2년이 흐른 뒤에도 펠로시가 최근 2개월 막후에서 활동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바이든을 후보에서 사퇴시켰고, 민주당의 주요 계파로부터 카멀라 해리스에 대한 지지선언을 신속하게 유도했다. 또 하원에서 12년간 그와 호흡을 맞췄던 팀 월즈 지사를 해리스의 러닝메이트로 만들어냈다. 펠로시는 하원의장 시절 월즈 지사가 보훈위원회(Committee on Veterans' Affair) 간사(ranking member)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줬다.
후보를 포기한 바이든 대통령도 펠로시 행동에 악의가 없었다는 걸 안다. 펠로시가 추천한 이를 이탈리아 대사에 임명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소문도 믿지 않는다. 민주당에 대한 펠로시의 사랑이 조 바이든에 대한 개인적 애정보다 컸기 때문이다. 펠로시로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복귀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고, 트럼프가 승리한 최악 상황에서는 의회에서 트럼프를 견제할 방도를 마련하려 한 것이다. 하원의장으로 일하며 오바마와 바이든 정부의 내치에 필요한 주요 입법에 결정적 도움을 줬던 펠로시가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그의 충성심을 보여준 셈이다.
펠로시는 해리스의 11월 대선 승패와 관계없이, 민주당의 확실한 지도자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퀸 메이커'로 불릴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됐다. '최초의 퀸 메이커'라는 수식은 펠로시가 인생 역정에서 쌓은 수많은 '첫 번째' 수사 중에서 가장 화려한 대단원일 것이다. 지난 몇 주 펠로시의 조용한 파워 플레이를 목격한 한 관찰자는 "그는 잠들지 않는 상어와 같다"고 말했다. 펠로시 아버지의 딸에 대한 적절한 찬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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