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소 ·극· 장 : #18 제주 '빈집 재생 숙소']
스타트업 '다자요', 2017년부터 빈집 리모델링
마을 분위기 유지하며 현대적 디자인 접목
젊은 여행객 호응...마을 정착 사례도 늘어
내부에 제주산 물품 비치...지역경제 기여
편집자주
지역 소멸위기 극복 장면, '지역 소극장.' 기발한 아이디어와 정책으로 소멸 위기를 넘고 있는 우리 지역 이야기를 4주에 한 번씩 토요일 상영합니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에는 유독 바람이 잘 부는 집이 있다. 201번 버스를 타고 하천하동 정류장에서 내려 20분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빨간 지붕이 덮인 '하천바람집'이다. 까만 돌담을 지나 초록색 현관문을 열면 제주의 햇살이 쏟아지고, 집 안 곳곳에 배어있는 감귤의 향취가 느껴지는 이 집은 원래 오랫동안 방치된 '빈집'이었다. 학교와 직장을 찾아 시내로, 뭍으로 떠난 자손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홀로 자리를 지키다 흉물이 되는 게 빈집의 운명이지만 이 집만은 자꾸 사람들이 찾아온다.
하천리 사람들은 의아했다. 제주 전역에 상흔을 남긴 4·3사건 당시에도 희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외진 동네를 외지인들이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알 수 없어서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감귤과 밭농사를 짓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집을 고친 숙소에 하룻밤 머물고 간 사람이 다시 한 달을 살고, 아예 동네에 터를 잡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궁금증이 풀렸다. 달라진 빈집이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2017년부터 빈집을 무상으로 장기 임대해 숙소로 다시 꾸미고, 관광객에게 빌려준 뒤 임대 기간이 끝나면 집주인이나 고향을 찾는 자손에게 돌려주는 스타트업 다자요의 빈집 프로젝트가 만든 결실이다. 전통적으로 제주의 대가족이 머무는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형태를 그대로 살리면서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새롭게 꾸민 이 집에 여행자들은 열광했다.
쇠락해가던 마을 살린 '빈집'..."오신 분들 잘 안 나가"
마을 분위기도 달라졌다. 서핑하고, 러닝하는 젊은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안태우(48) 하천리 청년회장은 "남은 빈집을 리모델링해서 살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젊은 사람들도 생겼다"며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이 오히려 마을 활동에도 더 적극적이다. 마을에 대한 자긍심도 더 강하다"고 전했다. 하천리 청년회가 추진하는 '집집마다 매일 태극기 달기' 사업에도 이주민들은 적극 협조했다. 명맥이 끊겨 가던 해녀학교에는 신입생도 생겼다.
안 회장은 "이제 하천리에 남은 빈집도 거의 없다"며 "오신 분들이 웬만해서는 안 나가려고 한다. 빈집 생기면 연락 달라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환히 웃었다. 실제 2017년 499세대(1,072명)에 불과했던 하천리 인구는 2023년 기준 657세대(1,363명)로 늘었다. 옆 마을인 성읍1리(1,390명→1,257명), 세화3리(152명→133명) 등에서 인구가 감소한 것과 상반된 결과다.
정주인구보다 관계인구 확충에 초점...진입 장벽 낮춘다
빈집을 재생한 숙소에서의 경험은 제주 생활에 대한 외지인의 심리적 진입장벽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남성준 다자요 대표가 "제주 할망의 손길이 닿은 옛집을 고쳐 여행자들에게 '진짜 제주'를 보여주고, 익숙한 공간으로 여기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유다. 그는 "잠만 자는 숙박업소가 아니라 제주에 관한 이야기와 체험이 담긴 '쇼룸'을 지향한다"며 "저희는 인위적인 소개를 하지 않는다. 하천리를 알게 된 사람들이 동네를 산책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다음에 올 사람에게 소개할 수 있는 거점을 제공해 줄 뿐"이라고 말했다.
빈집을 재정비할 때 ①마을의 경관을 해치지 않고 ②집 본연의 정취를 잃지 않으면서 생활 편의성을 높이고 ③청소·수리·방역 등 부수작업은 원주민에게 맡긴다는 원칙을 깨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자요 숙소에 놓인 샴푸와 보디로션, 냉장고의 계란과 요거트 등은 모두 제주산 제품들이다. 먹고, 자고, 노는 모든 경험이 '여행→구매→거주'라는 선순환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지역 경제 발전을 돕는 부가적 효과도 있다.
한때 선인장 열매 사업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끊기면서 쇠락한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도 이런 빈집 리모델링 효과를 기대한다. 월령리 바닷가에 위치한 월령바당집은 100년이 넘은 집을 재생한 숙소다. 현무암으로 이뤄진 내부 기둥과 외벽이 골격이 됐고, 2층 다락방 창에서는 탁 트인 월령 바다가 액자 속 그림처럼 담긴다.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들은 머무는 동안 해안도로와 선인장 군락지를 둘러보고, 4·3 피해자 진아영 할머니 집터를 둘러보며 제주의 아픈 역사까지 느끼고 간다.
강한철(49) 월령리 이장은 "연로하신 부모님이 시설에 입소하거나 돌아가시면서 방치된 집들이 곳곳에 있다"며 "이런 집을 새롭게 정비만 해도 마을 분위기가 달라진다. 예쁜 집에 놀러온 외지인들이 올레길도 걷고, 주변 상권도 이용하면서 활기가 돌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에 생긴 '우리 집', 언제든 갈 수 있어요"
지자체 간 제로섬 게임이 돼 버린 정주인구 늘리기 경쟁을 탈피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오히려 '관계인구' 늘리기에 방점을 찍으면서, 단기간이라도 제주를 깊이 경험한 여행자들이 점차 생활권역을 제주까지 확대하는 사례가 다수 나왔다.
제주 여행을 왔다가 3년간 머물렀던 김주영(43)씨 가족 사례가 대표적이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2020년 제주 봉성양옥집에 묵었다가 제주에 눌러앉기를 택했다. 이 집은 다자요가 애월읍 봉성리에 있는 빈집을 고쳐 만든 숙소다. 아토피가 심해 매일 밤 몸을 긁었던 김씨의 아이는 여기서 머물던 사흘간 울지도 않고 잘 잤다. 김씨는 그 길로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다자요가 재탄생시킨 빈집 재생 숙소를 돌며 머물던 그는 아예 애월에 있는 집을 소개 받아 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사진에서 봤던 집이 너무 예뻐서 좋았고 나중에는 제주 생활 자체가 행복했다. 서울에선 만들 수 없는 기억을 많이 만들었다"며 "빈집 숙소에 머물며 마을 주민들과 교류했던 게 초기 적응이 어렵지 않았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빈집이 일종의 '정거장'이 된 셈이다. 김씨 가족은 현재 원래 살던 서울로 돌아왔지만 제주는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됐다. 그는 "지금 서울에서 살 수 있는 건 제주에서 만들었던 3년간의 기억 덕분"이라며 "기회만 된다면 주저없이 제주로 다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유출 인구 늘어난 제주, 빈집도 급증
물론 '빈집 재정비'만으로 전체 인구 소멸 위기를 극복하기는 역부족이다. 교통, 교육, 의료 등 인프라와 일자리 부족으로 인해 유입 인구보다 유출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때 전국적 현상이었던 제주살이 열풍이 급속히 사그라들면서 지난해 제주 순유출 인구는 1,687명으로 2009년 이후 14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특히, 20대 청년층의 탈제주 현상이 도드라졌다. 지난해 연령대별 전출 규모를 보면 20대가 21.5%(1만7,942명)로 가장 많았다.
주인 잃은 빈집은 그만큼 늘고 있다. 제주도에 따르면, 지난 2019년 862개에 불과했던 제주 도내 빈집은 2024년 1,200~1,500여 개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제주도는 '2024년 빈집 실태조사'에 접수된 추정 빈집 3,500개 중 2,717개의 현장 조사를 마친 상태다.
남성준 다자요 대표는 "빈집은 전염병과 같아 한 번 늘어나기 시작하면 마을을 집어삼킨다. 빈집이 늘수록 불안해지고 사람도 인프라도 사라진다"며 "정부와 지자체가 빈집 재생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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