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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상사 성추행 고발했다 10년째 괴물로 불려...내가 죽어야 끝날까요"

입력
2024.10.13 13:00
수정
2024.10.13 15:54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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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래픽=박구원 기자

저는 한 직장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해온 40대 후반 워킹맘입니다. 가정생활은 화목하지만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의 괴로움이 때로 일상을 짓누를 정도입니다. 10여 년 전 상사의 문제 행위를 밝혔던 저는 내부 고발자로 낙인찍혀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 저는 회사에서 부당한 징계를 당할 뻔했습니다. 직속 상사였던 A는 징계를 피할 조언을 해 주겠다는 명분으로 저를 유인해 성추행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침착하게 대처해 별 탈 없이 귀가할 수 있었고 저는 그 일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A는 사내 부정 채용 사건에 연루됐습니다. 저는 A가 문제가 많은 직원임을 밝힐 때라고 생각해 제가 겪은 일을 회사에 알렸습니다. A는 해고됐고 잘 해결된 듯 보였지만 그때부터가 제 진짜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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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내부 고발자 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지만 당시는 익명이 보장되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제게는 상사를 모함한 내부 고발자란 딱지가 붙었고 어디를 가나 수군거림을 느꼈습니다. A는 사내 정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의 주도에 따라 저는 어느새 회사 내 괴물이 돼 있었습니다. 특히 한때 한 부서에서 일하며 가까이 지냈던 후배 B가 이 일의 중심에 있음을 알게 돼 배신감이 컸습니다. B가 지속적으로 저를 비방했음을 훗날 퇴사한 한 동료로부터 알게 됐습니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제가 B에게 한창 의지하던 시절에도 B는 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는 사실입니다. 회사 대표가 몇 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저에 대한 험담은 사라지지 않아 저는 승진 인사에서도 동료들보다 뒤처지는 처지가 됐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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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동료 C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해묵은 힘든 기억이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C는 제가 하는 일마다 시비를 걸고, 문제를 지적하면 소리를 지르기 일쑤입니다. 제가 여러 소문의 주인공이어서 전형적인 '강약약강' 캐릭터인 C가 저를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함께 소리치며 싸울 수는 없어 많이 참기도 하고 대화를 피하는 중입니다. 이렇게 참기만 하다 보니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듭니다. 대체 10년도 지난 일이 왜 지금까지 고통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회사를 그만두면 소문이 사라질까요. 제가 죽어야만 끝나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자상한 어머니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항상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며, 10대 아들과도 소통이 잘되는 편입니다. 가정 생활이 원만하다 보니 회사에서 겪는 이 상황이 더 큰 좌절인 듯합니다. 관계를 맺는 데 조심스러워져 주변에서는 저를 차가운 사람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가족과 친구가 아닌 제3자가 객관적 시선으로 제 잘못이 아니라고 판단해 주는 말을 꼭 듣고 싶습니다.

박수연(가명·48·직장인)

직장 내 트라우마를 겪고 재경험하는 상황에서 그 어려운 시간 동안 도망가지 않고 버텨낸 수연씨를 우선 칭찬하고 싶습니다. 트라우마로부터 심리적으로 회복되는 데 가장 방해되는 게 회피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사연으로 정리하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었을 텐데 정말 고생하셨다는 말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내부 고발을 했던 당시의 일을 담담하게 적으셨지만 아마 간단치 않은 상황이었을 겁니다. 상사와의 일을 회사에 알리기까지 괴로웠을 것이고, 또 심사숙고해야 했을 겁니다. 다시 떠올리기 힘든 과정이었을 테지만 그때 상황으로 한번 돌아가 보는 게 필요합니다. 감정을 다시 경험해야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그때의 경험, 그 후에 다시 겪은 괴로움 모두 수연씨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스스로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와 신념, 도덕적 결단력과 용기가 반영된 행동이었을 겁니다. 수연씨 행동 덕분에 직장 내 문화가 개선되는 등 많은 긍정적 변화도 있었을 겁니다.

다만 수연씨가 때로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그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받는 것은 이상 심리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후 관련된 감정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사건을 연상시키는 자극과 상황으로 언제든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경험하고 괴로워질 수 있습니다. 수연씨는 현재 C라는 분과의 갈등을 통해 과도하게 신경이 예민해지는 과각성 증상을 겪고 있는 듯합니다. 충격적 사건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부당한 대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타인의 소소한 행동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될 여지가 있습니다. 수연씨는 용기를 내어 상사를 고발했지만 그로 인해 동료로부터 비방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후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연씨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잘 모르는 동료들에게 비방을 받은 과거의 경험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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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싶은 걱정스러운 부분은 수연씨가 가족에 대해 설명한 내용입니다. 수연씨는 부모님과 남편, 아들을 모두 이상적인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을 이상화하는 것은 자기 불안을 감추고 싶거나 통제하기 힘든 큰 경험을 한 경우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무력감과 어려움을 피하고 안정을 경험하기 위해 통제 가능한 주변 사람을 이상화하는 것이지요. 이는 과거의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부족해 마음이 많이 위축됐을 때 나타나는 방어기제입니다. 물론 순간적인 위안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게 건강한 것이지, 한쪽 방향으로만 사람들을 보는 것은 수연씨에게 오히려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수연씨는 "가족과 친구가 아닌 제3자가 객관적 시선으로 제 잘못이 아니라고 판단해 주는 말을 꼭 듣고 싶다"고 하셨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잘잘못을 가리는 게 아니라 수연씨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잘했냐, 못했냐를 가리는 것에 몰두하는 것은 이미 자기비하에 빠져 있다는 방증일 수 있습니다. 수연씨의 고통이 외부 상황 때문에 생기긴 했지만 이 상황에 몰입하고 집착하는 것도, 자유로워지는 것도 수연씨 마음에 달린 것이니까요.

수연씨가 본인의 성격을 묘사한 부분에서도 트라우마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엿보입니다. 믿고 의지했던 B에게 배신당하는 경험을 하면서 신뢰감이 깨지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분명히 수연씨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됐다는 생각에 언제든 배척당할 수 있다는 자기비하적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직장의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인지 왜곡도 생길 수 있고, 인간관계에서 방어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리 경계하고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고 믿지도 않는 거죠. 수연씨가 남들이 보는 자신의 성격을 "차가운 사람으로 여긴다"고 설명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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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수연씨에게 편지를 써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힘든 상황을 버텨온 것은 칭찬합니다.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사의 잘못을 밝힐 당시의 수연씨가 가졌던 굳건한 가치관과 신념을 잊고 지내는 건 아닐까요. 혼란과 두려움, 외로움을 느꼈지만 용기를 냈던 나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편지를 써 보세요. 글쓰기는 중요한 트라우마 치료법입니다. 신념을 지키게 해 준 과거의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해 보는 겁니다. 당시 수연씨의 선택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수연씨 스스로에게 공감하고 격려해 보세요.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인한 조직의 변화, 동료들이 누리게 된 혜택 등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과거의 일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단정하고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세요. 동료들 사이에 퍼진 소문이나 평판은 수연씨가 정확하게 확인할 수도, 직접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통제하고자 할 때 상황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를 의심하는 분위기를 내비치면 상대 역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악순환도 발생합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마음입니다. 과거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 수연씨 스스로에게, 또 수연씨 감정에 집중하는 게 중요합니다.

C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경계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좋은 사람이려고만 하면 오히려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는 게 사회적 관계입니다. 평판을 생각해 C와의 대화를 피하기보다 C가 선을 넘을 때 최소한 정색은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갈등을 애초에 차단하느라 자기 경계를 엄격하게 세우거나, 좋게 무마하는 식으로 갈등을 회피하면서 자기 경계를 세우지 못하기도 합니다. 수연씨는 과거 경험 때문에 C에게 의사 표현을 하다가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것이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듯합니다.

수연씨가 스스로 오랫동안 버텨온 것에 대해 저는 다시 한번 박수를 쳐 주고 싶습니다. 이제는 두렵더라도 과거의 경험이 수연씨를 규정하지 않도록, 조금은 마음을 열고 자기 감정을 표현해 볼 것을 권합니다. 주변 반응이 아닌 자기 감정에 집중할 때 비로소 수연씨의 진심이 차츰 전달될 것이고 주변 상황도 긍정적으로 변해갈 수 있음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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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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