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우리 고전소설 가운데 최고는 누가 뭐래도 ‘춘향전’이다. 과거 영화 업계가 침체에 빠질 때마다 ‘춘향전 만들어 빠져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장면마다 열광한다. 심지어 그 스토리 라인을 뻔히 아는데도 말이다. 이와 달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 꼽으라면 ‘이춘풍전’이다. 전자가 18세기, 후자가 19세기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 소설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과 이춘풍은 아주 대조적이다. 이몽룡은 자타가 공인하는 ‘엄친아’다. 그에 비해 이춘풍은 매우 덜떨어진 한량이다. 탄탄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다 물려받은 재산 거덜 내고, 아내의 보증으로 빌린 돈마저 평양 기생에게 잡혀 탕진한다. 춘풍에게 삶의 즐거움이란 오로지 먹고 마시고 노는 데 있었다. 독자 입장에선 훨씬 재미나는 캐릭터다.
눈길이 가기로는 두 소설의 배경이 모두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 대왕 즉위 초’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작품들만이 아니다. 꽤 많은 우리 고전소설이 그 배경을 숙종 때로 잡는다. 왜일까?
춘향전의 가장 오랜 이본은 ‘만화본 춘향가’(晩華本 春香歌)이다. 1753년 곧 영조 29년, 만화(晩花) 유진한이 전라도 여행 중 판소리로 듣고, 그 내용을 한시로 옮겨 놓은 것이다. 아마도 영조 초기, 첫 이야기꾼은 감히 배경을 당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앞선 숙종 때로 슬쩍 끌어올렸으리라 보인다. 게다가 숙종의 재위 기간이 지닌 시대적인 매력이 있다. 숙종은 보기 드문 강력 군주였고, 40년이 넘는 치세 동안 벌어진 세 번의 환국(換局)이 역동적이었으며, 여기에 희빈 장씨라는 희대의 인물이 정치적 소용돌이와 맞물린다. 한마디로 이야기 만들 거리가 어느 때보다 풍부한 시대였다.
춘향전은 ‘비바람이 순조로워 백성은 부른 배를 툭툭 치며 격양가’를 부른다고, 이춘풍전은 ‘산에 도적이 없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주워가지 않았으니 중국의 요순시절’ 같았다고 시작한다. 이런 태평성대에 웬 탐관오리며 주색잡기가 판치는 소설이란 말인가. 사실은 소설의 역설이었다. 당쟁으로 얼룩지고 비선으로 꼬이는 시대였다. 그래서 시대가 지난 다음 이야기꾼의 입방정에 바로 올라갔다. 실은 요즘 우리 정국이 그에 비견한다 싶어, 이 황당한 시절 지나고 어떤 소설이 나올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이다. 주인공은 아무래도 이춘풍에 가까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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