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초등학생 아이가 현장체험학습을 떠났다. 전세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의 과학관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7시간 남짓한 일정이다. 인사하고 뒤돌아선 아이 뒷모습을 보며 추운날 온몸에 소름이 돋듯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나는 세월호 참사 때 100일도 안 된 신생아를, 이태원 참사 때는 생후 9개월 된 아기를 키우고 있었다. 아기는 타인의 돌봄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취약한 존재였고, 나에겐 아기 돌봄과 보호가 지상과제였다. 그때 두 사건이 닥쳤다. 잠든 아기 옆에 누워 물속에서, 사람들 틈에서 숨을 잃었을 아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아이들이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현장학습을 갈 때면, 두 번이나 몸에 새겨진 이 감각이 나를 덮친다.
불안을 달래고 싶어 세월호 10주기에 읽었던 글을 다시 읽었다. 진은영 시인은 당시 ‘씨네21’에 이렇게 썼다. “그들(세월호 부모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들이 불행을 겪은 이들이고 우리가 선량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승선한 배의 물 새는 구멍으로 그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 물이 들어온다고,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물 새는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 준 사람들, 고맙게도 이 사실을 크게 외쳐주는 사람들. 나는 그동안 세월호 부모들에게 연민과 부채감만 가졌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사회가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내 아이는 이미 떠났는데 안전 대책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면 어땠을까. 정부는 재빠르게 참사를 지웠을 것이고, 부모들은 더 오래 마음을 졸여야 했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최근 2주기를 앞두고 참사 이후의 삶을 담은 책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를 출간했다. 출간기념회에서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이 책을 가장 먼저, 꼭 읽어야 할 사람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꼽았다. 유가족들은 법원이 이태원 참사로 기소된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과 박희영 용산구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해 마음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국민의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며 책을 읽고, 물 새는 곳을 막으라 외쳤다.
나는 이런 부모들을 또 안다. 아이를 교제살인으로 잃은 부모들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폭력의 증거를 들고 카메라 앞에, 국회에 선다. 2020년 둘째 딸의 남자친구에게 두 딸을 한꺼번에 잃은 나종기씨도 그중 한 명이다. 몇 번이나 삶을 등지려 할 만큼 삶에 대한 의욕이 꺾였던 그였지만 22대 국회의 교제폭력 입법 소식을 듣곤 한달음에 서울로 왔다. 그도 참사 부모들과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이미 애들을 잃었지만, 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아야 하잖아요. 이 나라에서.”
‘남의 아이’를 살리려 거리에 서는 마음은 감히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거대한 불행의 피해자가 아닌, 위대한 용기로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부모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조금 전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학생들이 곧 학교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우리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은 아이가 오늘 만난 모든 어른들, 그리고 거리에서 ‘남의 아이’ 안전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준 모든 부모들 덕분이다. 그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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