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성의 이슈메이커]
해리스 패배 원인 복기한 안병진 교수
"민생, 법과 질서 이슈 싸움이 벌어진
이번 대선은 1968년 대선과 판박이
'통계, 변명' 대신 '사과, 대안' 내놨어야"
편집자주
한국의 당면한 핫이슈를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간단히 줄이자면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는 '카멀라 해리스의 패배'다. 지난 5일 치러진 미국 대선에 대한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의 총괄 평가다.
미시간 등 7개 경합주에서, 그리고 전국 득표에서도 이겼다지만 차이는 미미하다. 트럼프가 몰고 올 과도한 우경화에 대한 우려도 작동했다. 하지만 그런 우려가 해리스의 표가 되지 않았다. 안 교수는 그걸 정치 경력이 짧은, '검사 정치의 한계'라 봤다.
안 교수는 서강대, 서울대를 거쳐 미국 뉴욕 뉴스쿨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 두 전직 대통령을 비교한 논문으로 '한나 아렌트상'을 받았다. 안 교수는 미국 정치, 특히 선거 캠페인 전문가로 꼽힌다. 그 때문에 미 대선 이후 지금까지 밀려드는 각종 출연, 기고, 인터뷰 요청 등으로 일정을 시간 단위로 쪼개 쓰고 있었다.
-'박빙'이라 했는데 트럼프의 완승이었다.
"시대정신이 트럼프에게 있었다. 선거 초반부터 해온 얘기인데,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플레이션이다. 먹고살기 팍팍하다는 거다. 식료품 물가상승으로 치명타를 입은 저소득층에게 임금 수준이 나아졌다는 통계치를 줘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제 반성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문제니까 넘어가자. 다른 하나는 한국에 덜 알려진 '법과 질서', 즉 로 앤드 오더(law & order) 문제다. 미국 정치의 핵심 키워드인데 너무 간과됐다."
2024년 대선은 닉슨이 승리한 1968년 대선의 판박이
-법과 질서라는 건 어떤 건가.
"미국 내 '진보의 아성'이라 불리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의 민주당 정치인들은 엄청 곤혹스럽다.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 같은 사람이 '너희 진보가 그렇게 훌륭하다고? 어디 한번 당해봐' 이러면서 불법 이민자들을 버스, 비행기에 태워서 진보 도시에다 보냈다. 진보 도시들은 이민자를 수용하느라 정신없다. 그 결과 뉴욕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이라는 브롱스, 퀸즈 같은 곳에서도 트럼프 표가 2~3배 이상 늘었다. 또 하나는 펜타닐 문제다. 서부에 가보면 약물 오남용 중독자들이 길거리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이런 혼란상이 싫으니 정리해달라는 게 법과 질서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은 1968년 대선 당시 리처드 닉슨의 승리와 동일하다."
-그러고 보면 닉슨도 그 유명한 '68혁명' 와중에 승리했다.
"묘한 평행이론이다. 그때도, 지금도 현직 대통령 린든 B 존슨과 조 바이든이 재선 출마를 포기했고 현직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와 카멀라 해리스가 출마했다. 험프리도 전임 존슨과의 차별화에 실패한 가운데 닉슨은 '법과 질서'를 내걸었다. 닉슨에겐 케빈 필립스라는 탁월한 전략가가 있었다. 그는 '사회 진보, 민권 신장 다 좋은데 이렇게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건 싫다는 이들, 침묵하는 다수를 공략하자'고 했다. 이 전략이 1968년 유혈사태로 치달았던 민주당 전당대회 등과 맞물리면서 미국민들에게 먹혀들었다. 올해 민주당 행보, 대선 흐름과 판박이다."
-해리스도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경력을 내세웠다.
"너무 안이했다. '검찰총장하면서 마약 카르텔, 아동 성 착취범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고 했는데 그뿐이었다. 사실 해리스는 민주당 진보파들에겐 의심의 대상이었다. 사형제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선 것 등 여러 요인들이 있다. 그 때문에 해리스는 검사로서의 커리어를 내세우면 법과 질서에서 뒤지지 않는다 생각한 것 같은데, 그건 민주당 내에서나 통할 이야기다."
생활고와 '법과 질서'의 문제에 응답하지 못했다
-경제문제도 지표상으로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노무현 정부가 딱 떠오르지 않나.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부의 경제지표는 보수 정부보다 좋았다. 그래서 그때 '곧 보수 포퓰리즘의 시대가 온다'고 주장한 나를 두고 노 대통령은 '동의 못한다' 했다고 들었다. 바이든도 해리스도 인플레이션은 이제 거의 다 잡혔고 경제지표가 좋다고만 했다. 그런데 정치 캠페인의 오래된 격언 중 하나가 'Perception is everything'이다. 객관적 지표보다 주관적 인식이 더 영향을 끼친다."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는 건가.
"그렇다. 예를 들어 기후위기 우려가 많았고 그에 따라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러니 인플레이션에 자극을 준다. 하지만 그런 대의에 유권자들이 주목하느냐.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당장 마트에서 살 계란 값과 땅콩버터 값 폭등이 싫은 거다."
-바이든 정부의 경제, 입법 성적표를 내밀며 유권자들의 정보, 인식 부족을 탓하는 이들도 있다.
"몰라줘서 억울하다라고 하는 순간 진보의 엘리트주의가 시작되는 거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대선 캠페인은 시다, 집권 뒤 국정 운영은 산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선거 국면에서 복잡하고 긴 산문을 읽어준다고 누가 듣겠나. 대중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그 복잡한 산문을 하나의 시와 같은 문장으로 압축해내는 것이다. 유권자가 아니라 메시지 능력을 탓해야 한다."
-해리스는 그러지 못했나.
"여러 반론, 주장을 내놨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대선 전 과정을 들여다본 나로서도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내가 이럴 정도인데 일반 국민들이 해리스의 설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어야 한다? 당장 내 삶이 어려운데? 물론 해리스가 진정성이 없다는 얘긴 아니다."
'진보의 확장' 때문에 바이든 정부와 차별화에 실패
-진정성은 있었다?
"맞다. 민주당 내 진보파들이 하고 싶어하는 이슈들이 있다. 바이든 정부 시절 못다 한, 보육시설이나 공공주택 확대 같은 '진보의 확장' 어젠다들이다. 공화당은 반대하고 민주당 내 보수파도 머뭇대는 것들인데 해리스는 이걸 하겠다 했다. 맥락을 아는 사람들이야 좋아했지만 물가고에 생활이 어렵다는 일반인들에겐 '론드리 리스트(laundry list·세탁물 목록)', 그러니까 아무런 의미부여 없이 줄줄줄 나열만 해둔 리스트였을 뿐이다. 오죽하면 트럼프와 해리스 두 후보 중에 누가 더 진정성 있는 거 같냐고 묻자 트럼프라 답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접근법이 달랐어야 한다는 얘긴데.
"빌 클린턴의 유명한 말 중에 'I feel your pain(나는 당신의 고통을 압니다)'이 있다. 서민의 어려운 삶에 대해 질문을 받고선 한 말이다. 경제원론, 경제상식, 경제지표 얘기만 늘어놓는 건 방어적인 태도다. 충분한 공감과 사과를 표한 뒤 '돈 많은 기업들의 가격 담합 때문에 인플레 통제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트럼프 주변엔 돈 많은 기업인들뿐이다, 그러니 내가 집권해야 그러지 못하게 한다'라고 대답하는 게 훨씬 나은 응대였다."
-흔히 말하는 '검사 정치의 한계'인가.
"해리스는 소위 '검사로 뜬' 사람이다. 질문은 탁월하다. 상원에서도 그랬고. 그런데 숙달된 정치가로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대담함과 용기, 민심에 적절히 답변하는 감각이나 훈련은 부족했다."
-해리스가 '법과 질서'란 이름 아래 내놓을 수 있는 제안은 무엇이었을까.
"공화당이 초당적 이민법을 안 해줘서 그렇다, 라고 변명하기보다 여러 혼란과 불편함에 대해 일단 사과하고 그다음에는 이민 담당자로 강력한 인물을 내세워야 했다. 박근혜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를 생각해보라. 복잡하게 설명하느니 '김종인 영입'으로 그냥 보여줬다. 그게 대선 캠페인의 기본인데 그걸 못했다."
정리되지 못한 선거 캠프 ... 1988년 듀카키스 이후 최악
-그런 거 메워주라고 캠프가 꾸려지는데.
"해리스 캠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차차 얘기가 나올 것이다. 패인을 둘러싼 노선투쟁, 권력투쟁이 불가피할 테니까. 일단 오바마팀, 바이든팀, 해리스팀 3개의 팀이 효과적으로 결합하지 못했고, 바이든팀이 주도권을 쥐면서 바이든과의 차별화가 어렵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걸 정리해야 하는 사람은 후보자였다는 점에서 결국 해리스의 책임이다."
-바이든이 좀 더 일찍 물러났으면 해리스 캠프가 좀 더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을까.
"저 개인적으론 아까 말했듯 시대정신이 민생, 그리고 법과 질서이기에 해리스 같은 '샌프란시스코 리버럴'보다는 러스트벨트 출신인 셰러드 브라운 상원의원 같은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본다. 그런데 해리스가 초반 돌풍을 일으키길래 이렇게라도 이기려나 싶기도 했다."
-이번 패배는 대선 캠페인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남을 거란 얘기도 나온다.
"기가 막힌 장면들이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게 abc뉴스에 나가 '당신이 만약 과거로 돌아가면 바이든과 뭘 다르게 했겠느냐'라는 질문에 '별로 생각나는 게 없어요'라고 대답한 장면이다. 그 말 듣는 순간 정말 깜짝 놀랐다. 1988년 대선 당시 모두가 압승을 예상했으나 처참하게 패배한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 이후 최악의 순간이었다. "
-트럼프 캠페인은 어떻게 봤나.
"백악관 비서실장이 된 수지 와일스의 공이다. 플로리다주에서 오래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은, 밑바닥 민심을 훑어나가는 전형적인 현장형 선거전략가다. 와일스 때문에 플로리다가 경합주에서 공화당 지지주로 바뀌었다. 해리스 캠프와 비교하자면, 트럼프가 보수 싱크탱크 헤리지티재단의 정책 리스트를 읊어대는 걸 본 적 있는가. 대신 '감옥에 있는 트랜스젠더 성전환 수술비를 왜 국가가 대신 내야 하느냐'고 공격했다."
이번 대선은 트럼프의 승리 아닌 해리스의 패배
-혐오의 전략이다.
"이번 대선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격, 거대한 백래시가 예상된 선거였다. 한국의 '이준석 현상'이, '이대남 현상'이 미국에도 상륙한 거다. 소수자들의 고통을 감안하면 정체성 정치는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실제 득표와 연결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옳은 건 우리니까 국민이 이해해야 한다고 할 게 아니라 균형적으로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때 인구구성 변화 등으로 미국의 '백인 정체성'이 옅어지면 민주당이 장기집권하는 거 아니냐는 분석도 있었다.
"2008년 버락 오바마의 대선 승리 이후 민주당에서 나온 주장이다. 흑인, 히스패닉계에 이어 청년, 여성까지 끌어들였으니 이제 '레이건 민주당원'은 중요하지 않다는 목소리다."
-레이건 민주당원이란 어떤 이들인가.
"말 그대로 민주당원인데 대통령으론 레이건을 찍는 백인들을 말한다. 사회경제적으론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뉴딜 민주주의'를 좋아하지만 문화적으론 보수적인 백인들을 말한다. 오바마 승리 이후 '흑인 히스패닉 여성 청년, 4개의 카드만 있으면 레이건 민주당원이 없어도 우리가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농촌, 백인, 노동자의 분노가 2012년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중이 줄었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다수다. 거기다 흑인, 히스패닉, 여성, 청년이 무조건 진보적이라는 것도 착각이다. 특히 히스패닉의 경우 백인 주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는 '해리스의 패배'라는 건가.
"만약 트럼프가 좀 더 온건한 후보였다면 훨씬 더 크게 이겼을 거라고 본다. 민주당의 오만함이 너무 싫은데 트럼프라서 차마 찍지 못한 이들도 많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는 극단성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되레 손해를 본 경우라고 봐야 한다."
더 커진 트럼프의 발언권, 현기증 나는 하루하루 될 것
-곧 출범할 트럼프 정부에 대한 우려가 많다.
"개인적으론 수지 와일스가 백악관에서 얼마나 버텨낼 것이냐가 트럼프 정부의 명운을 가를 것으로 본다. 레이건, 아버지 부시 정부 등에서 일하며 실제 정책의 키를 쥐고 있었던 제임스 베이커 같은 역량을 발휘한다면 트럼프 정부는 의외로 잘 버텨낼 수 있다. 하지만 와일스도 그런 역량이 안 되고 트럼프는 레이건이나 부시와 다르다. 현기증 나는 하루하루가 될 것 같다."
-인선을 보면 '강경파'가 많다 한다.
"매파이긴 한데 트럼프 1기 존 볼턴보다는 그래도 현실주의자들이다. 국무장관에 내정됐다는 마코 루비오는 트럼프 말을 잘 듣는 사람이고, 국가안보보좌관이라는 마이클 왈츠 또한 강경파이긴 한데 지정학적 현실을 잘 안다. 백악관 정책담당으로 거론되는 스티븐 밀러 같은 인물들은 좀 걱정이 된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밀러는 반이민 강경파 중에서도 가장 강경하다. 군사작전하듯 불법 이민자 색출작전을 벌이는 등 난리법석이 벌어질 수 있다. 앞으로 인선 흐름은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한데, 그럼에도 결국 모든 열쇠는 트럼프가 쥐고 있다. 어쩌다 이긴 1기 때와 달리 2기의 승리는 온전히 트럼프 몫이다. 트럼프 본인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북한 파병 등으로 한국의 걱정도 많다.
"중동과 우크라이나 문제가 제일 크고, 북핵 문제는 북한의 몸값이 많이 올라가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후순위로 밀렸다고 보는 게 대체적 평가다. 하지만 확언은 어렵다. 트럼프는 TV를 보다 '트럼프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러면 난 다르게 하겠다'며 반대로 해버리는 사람이다. 예측이 어렵다."
-마지막으로 이번 미국 대선 결과가 한국 정치에 주는 교훈이랄까, 그런게 있다면.
"앞으로 최소 30년은 혼돈의 디스토피아 시대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간의 안정적 질서는 무너졌고, 혼돈의 시대에는 트럼프 같은 강한 포퓰리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객관적 지표나 대의명분 같은 것보다는 현장의 잔근육을 키워야 한다. 그게 앞으로의 승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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