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 부서 책임자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됐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법률을 준수하는 것은 공직자가 당연히 지켜야 할 덕목"이며 "상부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강변했지만, 결국 그는 1962년 처형됐다.
□ 홀로코스트 전범인 아이히만이 광기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료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란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재판을 지켜봤던 정치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가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중 한 사람이 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때문"이라고 썼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관한 보고'라는 책의 부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거나 사회 규범에 순응하면서도 악행을 저지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악의 평범성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12·3 불법 계엄 선포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반헌법적 시도를 알고도 제지하지 못한 국무위원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지시에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에 군을 투입한 장성들의 진부하리만치 무비판적 사고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은 "위기 상황에서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했고, 계엄사령관이었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자신이 발표한 포고령 내용이 위헌인지 몰랐다고 했다. 계엄이 잘못됐다면서도 대통령 탄핵 표결을 무산시킨 국민의힘 의원들도 다르지 않다.
□ 이번 사태로 보았듯이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은 순식간일 수 있다. 이런 엄청난 일이 극우 유튜브에 빠진 즉흥적 성격의 통치자 한 명만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적 생존을 위해 권력자에게 순응하는 데 길들여져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수많은 아이히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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