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반도와 남중국해 등 주요국 전략자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장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해드립니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이 격주 화요일 풍성한 무기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대영제국 최전성기를 이끈 헨리 존 템플 전 영국 총리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로지 이익만이 있을 뿐이며, 그 이익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지금도 국제정치학에서 진리로 통하고 있고, 국제관계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정상적인 국가의 의사결정은 철저하게 국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국가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얼마든지 대외적인 입장을 바꿀 수 있다. 그 명언을 남긴 템플 총리의 영국만 해도 프로이센·러시아·오스만제국과 손잡고 프랑스와 싸웠다가(나폴레옹 전쟁), 불과 수십여 년 뒤에 프랑스와 손잡고 러시아와 싸웠다(크림전쟁).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대적하고(러일전쟁), 얼마 뒤에는 소련과 손잡고 일본과 싸우는(제2차 세계대전) 변화무쌍한 영국의 대외정책 변화는 모두 국익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불변의 한미동맹 근거될까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는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는 것은 국제정세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국제정세의 변화는 각국의 내부 정치 사정, 과학기술의 변화 등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무쌍한 국제관계는 한미동맹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동맹도, 적도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지만, 우리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한미동맹만은 마치 영원불변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불변의 동맹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미국의 대외전략에서 한반도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이고, 특히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한미동맹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 한미동맹 불변론자들의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가 확정되면서 내년부터 미국의 외교정책은 바이든 행정부와 180도 달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트럼프 당선자 본인부터 고립주의 성향이 강하고, 그의 참모로 백악관과 내각에 입성이 예정된 인물들도 고립주의·상호주의를 강조해온 인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달러가 기축통화여야만 경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나라이고,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힘으로 경쟁자들을 찍어 눌러야만 했던 나라이다. 트럼프 당선자의 말과 행동은 미국이 두 가지 방법으로 이 달러 패권을 유지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높은 관세나 경제 제재와 같은 경제적 방법과 힘을 통한 제압, 즉 군사적 방법이 그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자는 최근 새로운 국제 결제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는 브릭스 국가들에 경제 보복을 예고했고, 집권 1기 때부터 힘에 의한 평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미국·유럽·일본 중심 블록 vs 러시아·중국 중심 블록 '대결 격화'
역사는 돌고 돈다. 1·2차 세계대전이 무역과 자원을 장악하고 있는 기성 강대국에 대한 신흥국들의 도전으로 발발한 것처럼, 지금 세계도 이해관계에 따라 빠르게 블록화되며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유럽·일본 등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하며 미국의 달러 패권이 유지되는 쪽에 베팅한 국가들의 블록이 있고, 전체주의·계획경제체제를 지향하며 기존의 미국·유럽 주도 국제질서를 뒤집으려는 쪽에 베팅하려는 중국·러시아 중심의 국가 블록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아프리카 어딘가의 내륙 깊은 곳에서 자급자족하는 소규모 부족국가가 아닌 이상, 각국은 이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패권 전쟁의 핵심 플레이어가 미국과 중국이니만큼, 서태평양은 이들 두 세력이 충돌할 때 가장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최전선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일본·대만과 함께 이 최전선에 서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주도 서방진영과 중·러 주도 반서방진영 충돌의 핵심은 이념과 돈이며, 그 충돌 형태는 경제적 제재와 군사적 충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경제적 충돌과 군사적 충돌이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싸움판에 서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른바 ‘안미경중’과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서태평양의 서방진영 국가들은 미국과의 경제·군사적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러시아와의 디커플링을 서두르고 있다. 트럼프 당선자는 우방국들에 피아 식별을 분명히 하고 진영 내에서의 역할을 확실히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미국 민주당 역시 지난 7월 발표한 정강정책에서 동맹·우방국들의 역할 강화를 촉구한 바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우리나라는 표면적으로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중국·러시아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행보를 보이며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블록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우리 정부가 이처럼 엇나가는 것은 외교가와 주류 학계에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은 절대 한미동맹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이 한 국가의 지정학적 가치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 바꿀 수 있는 무기 개발하는 미국
지난 3일 미 육군은 최근 배치를 시작한 신형 전술탄도미사일 ‘PrSM’의 다섯 번째 파생형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프리즘 인크리먼트 5’로 명명된 이 미사일은 1,000㎞급으로 예정된 인크리먼트 2보다 미사일의 덩치를 키워 사거리와 위력을 대폭 확대하고, 무인화된 발사 플랫폼에서 운용하는 무기로, ‘비현실적인 사거리 달성’을 목표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PrSM이 사거리 300㎞의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 대체 모델인 점을 생각하면 미 육군이 이 미사일의 사거리를 비정상적으로 늘리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군의 작전 개념이 물리적인 공간을 초월하는 다영역전투(Multi-domain battle)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PrSM의 사거리가 몇 천 킬로미터로 늘어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영역전투 시대에서는 ‘전투 공간’을 구분 짓는 것이 무의미하고, 이제 미군은 굳이 한국이 아니더라도 서태평양 어디서든 중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 PrSM을 운용하는 부대는 다연장로켓을 운용하는 포병부대이고, 무인화된 미사일 발사 플랫폼은 다영역임무부대(MDTF)의 전략화력대대에서 운용된다. 미국은 지난 2021년, 주한미군 제2보병사단 포병대를 재활성화하고 주한미군 포병 지휘체계를 2사단 포병대와 210포병여단으로 이원화했다. 이는 210여단을 제8군을 직접지원하는 MDTF 통제부대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은 주한미군 F-16 전력을 F-35A 스텔스 전투기로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었다.
변화무쌍한 국제관계...한미동맹 철통같다는 낙관 버려야
그러나 지난 11월 말,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이 MDTF를 필리핀에 배치하고, 해군해병대원정선박차단체계(NMESIS) 자산을 오키나와 열도에 배치하기로 하고, 일본과 함께 운용하기 위해 연합작전계획 수립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작업을 진행하며 한미연합사령부가 점점 힘을 잃어 가는데 반해, 주일미군은 4성 장군이 지휘하는 본격적인 전구사령부로 격상될 예정이고, 미일연합사로 가는 전 단계인 연합작전계획 수립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주한미군에 오기로 했던 F-35를 주일미군으로 돌리고, 주한미군 전투기 전력 감축을 결정하기도 했다. 최근 몇 달간 이뤄진 이러한 조치들은 미국이 대(對)중국 군사작전의 중심축을 한미동맹에서 미일동맹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과의 분쟁에서 ‘역할’은 못하는데 중국 미사일 사정권의 위협만 받는 전진기지라면 역할 삭제 이후의 수순은 ‘철수’가 될 수도 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국제관계는 변화무쌍한 것이다. 이 때문에 ‘수사(Rhetoric)’가 아니라 ‘행동(Action)’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우리 정부와 정치권이 한미동맹은 철통같다는 수사에만 빠져 행동을 보지 못하는 사이 한반도 밖에는 신애치슨라인이 그어지고 있다. 74년 전 애치슨라인이 어떤 비극을 불러왔는지 잊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수습책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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