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2002년 한국 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대회인 US오픈 16강에 진출했던 '레전드' 이형택 오리온 테니스단 감독이 최근 서울 중구 장충테니스장에서 본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2000년 9월 3일. 이형택이 머무는 미국의 한 호텔 방에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틀 뒤 미국 뉴욕 빌리진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의 아서 애시스타디움에서 열리는 US오픈 16강전을 앞두고 한국뿐 아니라 외신들까지 취재 경쟁이 붙은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형택은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세계 랭킹 182위의 무명 선수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미국프로골프(PGA) 우승에 비견될 정도로 어렵다는 메이저대회 16강에 진출해 당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인 피트 샘프러스(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 외신들은 일제히 그를 '한국에서 온 미스터리 맨', '감자골 출신의 무명 테니스인' 'US오픈의 깜짝 스타' 등으로 부르며 대서특필했다.
비록 세트스코어 0-3으로 완패했지만, 이형택은 첫 세트부터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며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펼쳤다. 샘프러스도 경기 후 "약간은 어려운 경기였다"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한때 세계 랭킹을 36위까지 끌어올리며 한국 테니스의 전설이 된 이형택 오리온 테니스단 감독을 최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만났다.
이형택이 건국대학교 1학년 시절 데이비스컵 아시아오세아니아지역 대회에서 선전한 모습이 1995년 일간스포츠 지면에 담겼다. 일간스포츠
운동이라면 뭐든 좋았던 '밥풀때기', 라켓을 손에 쥐다
이형택이 처음 라켓을 손에 쥔 건 강원 횡성 우천초등학교 4학년 때다. 지금의 이형택은 키 178㎝에 듬직한 체격을 지닌, 누가 봐도 '운동선수' 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별명이 '밥풀때기'였을 정도로 작고 왜소했다. 밥풀때기는 개그맨 김정식이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연기한 키 작은 건달의 별칭이다.
작은 몸에서 뿜어내는 순발력이나 스피드는 대단했다. 또래는 물론, 형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애초에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운동은 뭐든 재미있었고 잘했다"던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5, 6학년 형들을 제치고 학교 테니스부원으로 뽑힌 이유다. "운동해서 나중에 뭐 해 먹고 살겠느냐"며 반대했던 어머니도 공을 치며 즐거워하는 아들을 보며 마음을 돌렸다.
이형택은 "어느 날 서울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보내주신 소포가 집에 왔는데, 뜯어 보니 4만 원짜리 비싼 나무라켓이었다"며 "7,000원짜리 연습용만 쓰다가 처음으로 개인 라켓이 생기니 한동안 라켓을 부둥켜안고 잠에 들었을 정도로 행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형택 오리온 테니스단 감독이 최근 서울 중구 장충테니스장에서 본보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내 인생의 전환점,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형택은 어머니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밤낮없이 훈련에 매진했다. 전국소년체전에 나가기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새벽, 오전, 오후, 야간 할 것 없이 오로지 운동에만 매진했다. 잠깐 쉴라 치면 "이 시간에도 어머니는 일을 하고 계실 텐데" 하는 생각에 엉덩이를 붙일 틈도 없었다.
노력의 결실은 뒤늦게 꽃을 피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우승 이력이 없었는데, 3학년 때 42연승 기록을 세우며 고교무대 6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 상승세를 탄 이형택은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94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내로라할 정상급 선배들을 물리치고 생애 첫 태극마크를 달았고,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선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달성했다.
특히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그의 선수 생활에 한 획을 긋는 경기 중 하나다. 당시 이형택을 후원하던 삼성이 외환위기 여파로 휘청이면서 팀이 해체될 뻔했는데, 금메달을 따며 기사회생한 데다 병역 특례로 투어 진출의 기회까지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이형택은 "이때 입대했다면 2년 뒤 2000년 US오픈 16강 진출도 없었다"며 "여러모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대회"라고 강조했다.
이형택 오리온 테니스단 감독이 2002년 한국 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대회인 US오픈 16강에 진출해 한국일보 스포츠 1면을 장식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눈물의 야간버스' 와 '덴트의 기적'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 같았던 이형택에게도 시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는 2000년 US오픈을 앞두고 출전한 챌린저 대회에서 줄줄이 참패를 당하며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1, 2차 대회 탈락 후 3차 대회 참가를 위해 홀로 뉴욕행 야간버스를 타고 가다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기도 했다. 버스에 타기 전 급하게 먹은 햄버거가 말썽을 일으켜 황급히 화장실로 향한 게 발단이 됐다. 이형택은 "흔들리는 버스 화장실에서 안 넘어지려고 손잡이를 꽉 부여잡고 설사를 하는 내 모습을 거울로 보는 순간 너무 처량했다"며 "'내가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나' 싶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털어놨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지만, 한 번 처진 컨디션은 쉽게 올라오지 않았다. 결국 3차 브롱크스 대회도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대로 가면 US오픈 예선 통과도 장담할 수 없었기에 절망의 깊이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형택을 좌절의 늪에서 건져낸 게 '덴트의 기적'이다. 브롱크스 3회전에서 이형택을 꺾었던 당시 미국의 10대 유망주 테일러 덴트가 갑자기 건강상의 이유로 브롱크스 본선 진출을 포기하면서 이형택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일생에 한 번 얻기도 힘들다는 '러키 루저' 찬스다. 이형택은 이후 브롱크스 대회 우승에 이어 US오픈 16강 진출까지 11연승을 단숨에 내달렸다.
이형택 오리온 테니스단 감독이 최근 서울 중구 장충테니스장에서 본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7년 만에 US오픈 16강 재진입... '기적'을 '실력'으로 입증하다
이형택은 한 번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술을 끊고 웨이트 트레이닝에 매진하며 체력을 키웠고, 투어에 계속 출전하면서 정신적으로도 한층 단단해졌다.
그렇게 실력을 갈고닦은 이형택은 2007년, 7년 만에 다시 한번 US오픈 16강 고지에 올랐다. 당시 그는 32강에서 20세 신예 앤디 머레이(영국)를 꺾는 파란을 일으켜 다시 한번 세계 테니스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스스로도 "내가 드디어 '투어 선수'가 됐구나" 싶어 자랑스러웠단다.
투어에 계속 도전하면서 남자 테니스 '빅4'로 불리는 라파엘 나달(스페인), 로저 페더러(스위스)와도 실력을 겨뤘다. 한국 선수 중 나달, 페더러와 대결한 건 이형택이 유일하다. 세계적인 선수들과의 맞대결이 부담스럽지 않았는지 묻자 그는 "대부분이 내가 질거라 예상하는 데다 내가 조금만 잘해도 사람들이 놀라워해 주니 차라리 마음 편한 부분도 있었다"며 웃었다.
끝내 넘어서지 못한 '어머니 징크스'
숱한 성공과 시련을 지나며 단단해진 이형택이지만, 끝내 넘어서지 못한 것도 있다. 바로 '어머니 징크스'다. 그는 어머니가 경기장에 나타날 때마다 패했다. "기본적으로 미신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기 전에 미역국도 먹고, 계란프라이도 먹어 가며 통상적인 징크스들을 다 깼는데 어머니만은 예외였다"는 게 이형택의 설명이다.
그는 "어머니가 경기장에 오시면 저 멀리 떨어져서 숨어 보시는데도 꼭 내 눈엔 어머니가 보였다"며 "괜히 심적으로 부담이 돼서인지, 힘들게 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계속 졌다. 선수 시절 이 징크스를 깨려 부단히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형택 오리온 테니스단 감독이 최근 서울 중구 장충테니스장에서 본보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지도자로, 선수로 다시 시작하는 '제2의 인생'
2009년 은퇴 후 테니스 해설과 예능 프로그램 등을 종횡무진하며 바쁘게 지내온 이형택은 2022년 7월 테니스 유망주 양성의 꿈을 안고 오리온 테니스단 초대 사령탑을 맡았다. 그는 "테니스의 경우 생활체육은 활발해졌지만 엘리트 쪽은 완전히 위기"라며 "선수층이 얇아지면서 아시아 상위권이었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중위권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좋은 선수들이 나와야 기업 후원도 활발해질 테니 테니스협회 등에서 개선 방안 등을 전체적으로 돌아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기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내년부터는 직접 선수로서 대회도 뛸 예정이다. 이형택은 "선수를 잘 키우려면 선수들에게 긴장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공을 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선수들도 믿음을 갖고 한다"며 "우리부터 관리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선수로 굳이 돌아가려는 데에는 현역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다. 한창 좋을 때 부상으로 은퇴한 게 계속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그는 "은퇴 당시 (이)봉주 형이 '박수 칠 때 떠나지 말고 할 때까지 하라'고 했는데, 부상 때문에 떨어진 경기력을 받아들이지 못해 은퇴해버렸다"며 "그때 부상에 적응하면서 좀 더 오래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했다. 다만 "이제부터 하는 도전은 누구를 이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향해 달려가는 과정 자체가 좋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도전하며 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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