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클래식 노트]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요즘, 때마침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이 전해졌다. 소설과 현실이 묘하게 맞물리는 시점에서 작가는 이번에도 타인과 연대하는 사랑과 희망을 얘기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말로 혼란과 불안과 위기의 시대일수록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부드럽고 단단한 어조로 들려주었다.
문학을 읽고 쓰는 행동만큼이나 귀 기울여 잘 듣는 것도 중요하다. 듣기는 나의 주장과 욕구와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경청하려는 노력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려는 것도 음악의 감동과 함께 무대 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환희와 인류애, 혹은 자유를 듣기 위해서다. 듣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품게 하는 이 작품이,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작곡가의 상상력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럽지만 늘 놀랍다.
베토벤은 교향곡 7번을 완성했을 때 이미 난청이 시작됐다. 귀가 더 들리지 않게 되자 노트에 글자를 적어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연인과 조카, 친구들, 후원자들도 떠나 외로움과 괴로움, 가난까지 더해졌다. 현실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 성격도 괴팍해지고, 붙잡으려고 발버둥칠 때마다 더욱 악화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베토벤은 철저히 버려졌다. 자아는 깨지고 스스로를 포기하려고 할 즈음 그는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만나게 된다.
'한 친구에게 친구가 되도록 자신을 내던지는 데 성공한 이도, 고운 여인을 얻은 이도, 자기 환호성을 한데 섞어라.' '당신의 마력은 다시 엮어준다. 시류가 엄하게 갈라놓은 것을, 거지들도 왕자들의 벗이 된다.' '두 팔 벌려 끌어안으라, 수백만의 사람들아. 온 세상이 보내는 입맞춤을 받으라.'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실러 역시 고통과 절망의 시기를 보냈다. 그런데 그의 사상에 지지를 보낸 한 관료의 호의와 우정을 통해 희망을 갖게 되고 상황을 이겨내게 되자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축시 '환희의 송가'를 썼다. 고난의 시간을 이겨낸 사람의 환희는 전염성이 컸다. 베토벤은 환희를 주제로 곡을 쓰되 누구나 듣고, 알고, 각자의 목소리로 함께 부를 수 있도록 교향곡에 가사를 입혔다. 서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교향곡은 절대음악의 표상이었지만, 교향곡의 대표성을 갖는 작곡가로부터 틀이 깨지면서 더 큰 확장이 이뤄졌다.
좋은 변화 이끄는 '듣기'의 노력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철학자 한병철은 신작 '불안사회'에서, 희망이란 얼마나 적극적인 경청의 행위인지 설명한다. 이성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어려움, 괴로움을 추적하는 감각 기관에 불과하지만, 희망은 이성이 들을 수 없는 배음을 인식한다. 현실 변화 가능성을 외면하는 낙관주의와도 다르다. 낙관주의는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불편함이나 위험 부담을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희망은 불안이 가져오는 배타적인 태도와 비관, 혐오를 뛰어넘고 스스로 눈뜨고 변화의 가능성을 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때때로 음악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 준다. 수십 년, 수백 년 전 악보로 존재해 왔지만, 그 안에는 먼저 좌절하고 고통스러웠고 불안했다가 이를 극복하고 환희와 기쁨을 맞이한 사람들의 서사가 담겨 있다. 베토벤의 작품처럼 희망과 인류애가 벅차오르게 될 수도 있지만,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D.960 2악장을 조용히 들으며 갑자기 이뤄지는 조성 변화와 조합의 자유에서 먹먹함 뒤에 찾아오는 위로를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의 인터뷰 중에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스스로 질문하는 내용이 있다. 클래식 음악팬들은 '그렇다' 이야기할 것이다. 피로하고 불안한 사회, 희망을 품는 좋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문학을 읽고 쓰는 일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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