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화왕산성과 관룡사 용선대
해발 700m 산정, 이삭까지 훌훌 털어낸 ‘마지막 억새’가 바람에 눕는다. 시절도 그렇게 스러지고 다시 시작된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지난 13일 경남 창녕 화왕산성에 올랐다.
화왕산성, '환장고개' 끝나는 곳에 또 환장할 억새 평원
화왕산성은 창녕 읍내 동쪽 화왕산 정상(739m) 능선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낙동강 중·하류인 창녕은 일대에서 들이 넓은 곡창이자 경북으로 연결되는 주요 통로다. 화왕산성은 창녕을 보호하는 진산이자 인근 영산(창녕군)·현풍(대구 달성군)을 포용하는 군사 요충지였다. 세종 때 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중요성이 부각돼 의병장 곽재우가 이곳을 근거지로 왜병의 진출을 막기도 했다.
산성까지 가는 가장 짧은 등산로는 읍내 동쪽 송현리에서 시작된다. 자하곡 공영주차장에서 서문 터까지 약 2km, 1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그만큼 길이 가파르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작은 암자인 도성암까지는 포장도로여서 부담이 적다. 본격적인 등산은 도성암부터 시작된다. 시작은 의외로 순탄하다. 약 10분을 걸으면 제법 평탄한 솔숲 아래 운동기구까지 놓인 공원이 나타난다. 맥락 없이 ‘생명의숲’이라는 팻말이 붙었다.
이곳부터 진짜 등산이다. 경사가 점점 가팔라지고 돌부리도 험하다. 계곡과 나란히 연결되는 길이지만 물소리 대신 숨소리만 거칠어진다. 얼마나 남았을까 조바심이 나는데, 이정표에 힘이 빠진다. 생명의숲에서 1km 남았다는 안내판을 보고 한참을 걸었는데 1.1km로 늘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서문 터를 기준으로 삼던 목적지가 정상까지로 변경돼 있었다. 서문 터나 정상이나 산성 능선이긴 마찬가지인데 실제로는 약 300m 떨어져 있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 뒤를 돌아보니 바위에 뿌리 내린 키 작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창녕 읍내와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옆 능선에 아슬아슬하게 돌출된 ‘고래바위’가 보인다. 암반 위에 자라는 소나무 두 그루가 마치 고래가 물을 뿜는 형상인데 '부부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래바위 안내판 바로 아래에 팻말이 하나 더 붙었다. ‘지금부터 환장고개입니다. 정말 환장합니다.’ 참으로 속을 뒤집는 문구다. 환장고개 구간은 약 200m, 위협에 비하면 그리 겁먹을 정도는 아니다. 오르막이 끝나자 바로 산성 석축이 보인다.
끊어진 성벽을 통과하자 완전히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능선이 사방에서 비스듬하게 흘러내려 형성된 넓은 평원을 억새가 누렇게 덮고 있다. 이삭은 거의 떨어지고 없지만, 바람에 일렁거리는 대궁이 햇빛에 희번덕거린다. 맞서지 않고 바람에 눕는다. 그렇게 겨울을 지내고 새봄에 더 찬란한 생명으로 움틀 것이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억새 사이로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물기가 고인 평원 한가운데에 버드나무 몇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 억새’ 평원을 걷는 기분이 쓸쓸하지만은 않다.
화왕산성은 5세기 전후 토성으로 쌓았다가 나중에 석성으로 개축됐다고 한다. 발굴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기와 조각이 출토됐고, 집수지 바닥에서 9세기 중반의 자기, 철제와 청동 생활용품 및 장식이 출토됐다. 그러나 지금은 석축을 제외하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산성의 흔적은 거의 없다.
동문 터 비탈에 커다란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조선 말기인 1897년 경상남도 관찰사 조시영이 세운 ‘창녕조씨득성비’다. 바로 아래 연못도 창녕조씨 설화와 관련이 깊다. 신라 진평왕 때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이 병을 고치기 위해 화왕산을 찾았다가 용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이라는 설화가 전해진다. 서문 터로 되돌아와 성벽에 오르니 창녕 읍내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인다. 화왕산성을 처음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인의 숨결이 잔잔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1500년 시간 뛰어넘은 가야 소녀 '송현이'
화왕산성 등산로 입구와 창녕 읍내 뒤편에 가야 무덤이 남아 있다. 둘을 합쳐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으로 부른다. 지난해 7개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며 가야 역사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창녕 고분군은 비화가야 유적으로 보고 있다.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으로 금관가야(김해)가 급격히 쇠퇴하고, 아라가야(함안) 역시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소가야(경남 고성)와 함께 부상한 소국이다.
교동 고분군에 위치한 창녕박물관은 고분 수난사를 보듯 씁쓸하면서도, 작은 조각에서 되살린 가야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이곳 무덤군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1917년부터 1919년까지 11기의 고분이 발굴됐지만, 2기를 제외하고는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다. 조사자에 따라 고분 번호가 달라 정확하게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마차 20대와 화차 2량분의 토기와 금속 공예품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일부 유물을 제외하면 보관처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금동관모는 화려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는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쿠라컬렉션 한국문화유산’ 복제품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쿠라컬렉션은 일제강점기 오쿠라 다케노스케가 한국에서 빼돌린 1,000여 점의 문화유산이다. 오쿠라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인부들을 끌고 다니며 한국의 고분을 도굴한 악명 높은 상인이다. 국립도쿄박물관 ‘오쿠라컬렉션’에는 금동관모를 비롯해 창녕에서 출토된 문화유산 8점이 포함돼 있다.
우리 손으로 본격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92년이었다.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1~4호분의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2004년에는 65기의 고분을 추가로 확인했다. 경남문화재연구원(2002~2004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04~2006년) 발굴조사에서는 국내 최초로 배 모양의 녹나무관과 함께 280여 점의 토기, 90여 점의 철기, 100여 점의 목기가 출토됐다. 2006~2008년엔 이미 도굴이 상당히 이루어진 15·16·17호분 발굴조사가 진행됐는데, 특히 15호분에서 확인된 4구의 순장 유골이 큰 주목을 받았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그중 비교적 상태가 온전한 유골을 복원해 ‘송현이’로 명명했다. 박물관은 ‘송현이가 전하는 비화가야 이야기, 송현傳’을 전시하고 있다. 키 153.5㎝, 호리호리한 체구의 16세 소녀 송현이가 1,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은은하고 짙은 다홍색 복장으로 관람객을 맞고 있다.
발굴조사가 끝난 고분군은 현재 깔끔하게 정비된 상태다. 크고 작은 둥그런 봉분 사이로 탐방로가 이어진다. 평야인 읍내보다 조금 높은 위치라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무덤 뒤로 읍내 풍경과 멀리 산 능선이 그림처럼 포개진다. 특히 해 질 무렵이면 벌건 노을을 배경으로 잊힌 왕국의 비밀이 신비로움에 휩싸인다. 읍내 중심에 위치한 신라 진흥왕척경비,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함께 둘러보면 가야에서 신라로 이어지는 창녕의 오랜 역사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아슬아슬 벼랑 위에 평온한 부처님
읍내에서 화왕산 맞은편 자락에 신라 고찰 관룡사가 있다.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에 여행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다. 관룡사는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리다 연못에서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절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바위산은 구룡산이다. 사실 절에 들어서서도 전각보다 지붕 너머 기암절벽에 더 눈길이 쏠린다. 쪼개질 듯 뾰족하고,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바위에 소나무가 두루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한 폭의 그림이다.
경내에서 약 500m 산길을 걸으면 용선대에 닿는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석불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지형은 보기만 해도 아찔한데 부처님 표정은 편안하기만 하다. 불상의 공식 명칭은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작은 소라 모양으로 머리카락을 표현했고, 정수리 부근에 상투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단아한 몸체와 미소를 띤 표정까지 둥글둥글 원만하고 자비롭다. 양감이 줄어든 신체, 도식적인 옷 주름선, 8각 연꽃무늬 대좌 등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불상의 특징이라 한다. 원래는 머리 뒤 후광을 표현하는 광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처님의 자비가 어찌 불자에게만 해당할까. 용선대에서는 전후좌우로 풍경이 시원하다. 동짓날 해 뜨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불상 정면으로는 앞서 본 구룡산 바위 능선이 한층 우람하다. 우측으로는 산마을 풍경이 정겹게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화왕산 능선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이 풍경만으로도 한 가지 소원은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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