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대둔산과 삼례책마을
전북 완주는 산과 들로 전주를 둘러싸고 있다. 서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 반면, 동쪽은 산세가 험하다. 충남 논산·금산, 전북 진안과 험준한 고갯길로 연결된다. 덕분에 전주를 보호하는 천혜의 방어막으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나라 곳간을 지키는 요충이었다.
임진왜란과 동학혁명, 그리고 대둔산
완주, 논산, 금산의 경계인 대둔산은 치솟은 바위 봉우리가 그림처럼 아름다워 예부터 ‘전라도의 금강산’이라 불려왔다. 휘어진 도로를 따라 차를 몰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깊은 골짜기로 접어든다.
접근이 쉽지 않은 골짜기에서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완주 운주면과 금산 진산면을 잇는 고갯길 이름을 딴 이치전투다.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양과 평양을 점령했지만,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조선을 분할 통치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5월 말 고바야카와 부대가 임진강에서 남하해 전라도로 향했다. 6월 말 금산과 진안을 점령하고 웅치를 통해 전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금산 진산(당시는 전라도 땅이었다)으로 퇴각한 일본군은 전주로 진출하기 위해 이치를 공격했지만,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관군 1,500명과 함께 이들을 격퇴했다. 육지에서의 임진왜란 첫 승리였다. 후일 이항복은 이치전투로 인해 일본군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국가의 안전이 보장됨으로써 물자와 군량의 공급이 끊기거나 모자라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국가유산청 자료에는 사진과 함께 이치전적지를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표시된 주소(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2-15번지)로 찾아갔지만 헛수고였다. 계곡 옆 캠핑장에서 길이 끊겼다. 온라인 지도에는 바로 옆 언덕이라 표시돼 있었지만 안내판도 연결되는 길도 찾을 수 없었다.
이치전적지 바로 위로 대둔산의 바위 봉우리가 이마를 드러내고 있다. 시작부터 가파른 산길이라 대부분 산 중턱까지 연결된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오전 9시부터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요금은 왕복 1만6,000원이다. 2대가 교차 운행하는 케이블카는 6분 만에 승객을 상부정류장에 내려놓는다. 아래쪽 깊은 골짜기에는 아직 빛바랜 가을색이 남아 있는데 상부는 이미 겨울이다. 안개가 상승해 싸락눈을 뿌리고 있었다. 바위도 나무도 희끗희끗 눈가루를 뒤집어썼다.
험준한 바위 봉우리도 이곳부터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뾰족한 봉우리 군상은 하나의 능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우후죽순처럼 제멋대로 솟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아슬아슬한 바위에 용케도 소나무가 몇 그루씩 뿌리를 내리고 있다. 퇴적 주름 선명한 바위 하나하나가 세밀화요, 수십 봉우리가 합쳐져 장엄한 산수화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지만 워낙 길이 험해 왕복 1시간 30분은 잡아야 한다. 대개는 체력에 맞춰 구름다리(20분)나 삼선계단(40분)까지 왕복한다. 구름다리는 1975년 처음 놓였고, 10년 후 현수교로 교체된 후 근래에 지금의 다리로 교체됐다. 80m 허공을 가로지르는 짧은 교량이지만 시간과 체력을 아껴주는 고마운 존재다.
이어지는 삼선계단은 대둔산의 상징이자 인증사진 명소다. 121개 철 계단의 실제 기울기는 51도지만 체감상 수직에 가깝다. 본능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가고 몸을 계단에 밀착시킨다. 계단을 오르고도 아찔함은 끝나지 않아 한동안 숨을 고른 후에야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앞뒤 좌우에 곧추선 바위 기둥이 숲을 이루고 있다. 눈물겹게 험하고 수려하다.
케이블카, 구름다리, 삼선계단이 아니면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 정상 능선 형제봉 골짜기는 동학농민혁명 최후 항전지다.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후, 지역에서 활동하던 농민군 일부가 대둔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재기를 도모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이듬해 2월 총공세에 나서 25명 농민군 전원이 전사했다. 한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에, 해발 715m 고립된 산속에 웅거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실제 전적지는 지금도 접근이 힘들어 기념비는 산 아래에 마련됐다. 케이블카 하부정류장에서 약 100m 오르면 탐방로 초입에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항쟁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기단에 ‘척양 척왜 보국 안민’이라는 동학의 기치가 또렷하다.
이성계와 BTS, 위봉산성과 위봉사
소양면 위봉산성도 동학농민혁명과 인연이 깊다. 조선 숙종 때 쌓은 산성으로 행궁을 따로 두었다. 유사시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이성계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서다. 실제 동학농민혁명 때 전주성이 동학군에 함락되자 이를 피란시킨 일이 있었다.
산성은 둘레 8.6㎞에 4개의 성문, 6개의 암문, 2개 지휘소와 13개 포진지를 갖춘 대규모였지만 지금은 서문 일부만 남아 있다. 무지개 모양 석문은 BTS가 뮤직비디오를 찍은 곳으로 알려진 후 완주 여행 인증사진 명소가 됐다.
고갯마루의 산성을 넘으면 위봉사가 있다. 백제 무왕 때 창건했다고도 하고, 고려 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세 마리 봉황을 목격해 위봉사(威鳳寺)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찰 앞에 붙은 산 이름은 추줄산(崷崒山),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높고 높은 산이지만 전각 뒤편 능선은 부드럽고 아늑하다. 층층이 이어지는 정원이 아름답고 대웅전 마당의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우아한 풍취를 더한다.
사찰과 담장을 기대고 ‘봉강요’가 있다. 진정욱 도예가의 작업장이자 전시실이다. 무인 카페도 함께 운영하는데 수백만 원 하는 고가의 제품부터 생활 소품까지 다양한 작품을 구경하고 살 수 있다. 카페 뒤 정원은 단풍나무숲이다. 소복하게 떨어진 단풍잎에 초겨울 정취가 바스락거린다.
곡식창고가 문화창고, 삼례책마을
완주 동학농민혁명에서 삼례를 빼놓을 수 없다. 동학교도 수천 명이 집회를 열었던 곳이자, 전봉준이 2차 기포를 준비한 곳이다. 척왜양(斥倭洋)의 기치에도 불구하고 들이 넓은 삼례는 일제강점기 양곡 수탈의 중심이었다. 1920년대 삼례역을 중심으로 군산항으로 보낼 쌀을 보관하던 곡식창고가 다수 들어섰다. 쓰임새를 다한 창고는 현재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책마을, 그림책미술관 등으로 개조해 삼례읍의 문화창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삼례문화예술촌에는 4개의 전시장과 카페, 공연장이 들어서 있다. 삼례책마을은 고서점과 북카페로 운영된다. 10만여 권의 장서가 가득 들어찬 책방에서 현재 ‘전설의 DJ, 김광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종이 향기 가득한 서고에 ‘추억의 팝송’이 잔잔히 흐르는 듯하다. 그림책미술관에서는 ‘피노키오’ 전시가 열리고 있다. 관련 서적과 장식 외에 영국 빅토리아시대 그림책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해 질 무렵 인근 만경강가로 나가면 아름다운 일몰이 기다리고 있다. 조선시대 정자 비비정 앞으로 철새가 군무를 펼치고, 옛 철교 위에 놓인 예술열차 뒤로 떨어지는 노을이 은은하게 수면에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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