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엄정순 그림책 '코끼리를 만지면'
맹인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의 사자성어 '맹인모상'은 불교 경전 '열반경'에서 유래했다. 전체를 보지 못한 채 자신이 아는 부분만 가지고 고집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현대미술가 엄정순에게 '맹인모상'은 창의성의 다른 말이다. 엄 작가는 코끼리를 상상하고 찾아가 만져 보고 손끝의 경험을 표현하는 과정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림책 '코끼리를 만지면'엔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로 코끼리를 소재로 작업해 온 엄 작가의 예술적 여정이 담겼다. 작가는 시각 장애 학생들과 함께하는 미술 교육 프로젝트 '코끼리 만지기'를 10년 넘게 이끌어 왔다.
책을 펼치면 시각 장애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눈에 띈다. 수도꼭지에 매달린 호스, 진공청소기 등이다. 작가는 아이들과 함께 코끼리를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코끼리는 코가 길다"는 작가의 설명에 "윙윙 소리 나는 진공청소기랑 닮았겠네요"라며 아이들이 떠올린 이미지다.
"상상력은 많은 자극과 경험에서 자라난다"(작가의 말)고 믿는 작가는 코끼리를 만나 보려 아이들과 태국까지 다녀왔다. 책은 그렇게 작가와 아이들이 협업한 '한 번도 본 적 없는 코끼리' 조각의 사진과 회화를 담고 있다. 아이들은 상상력과 협동을 통해 대담한 예술 표현을 일궈냈다. '코가 길다'는 설명을 충실히 반영한 코끼리 조각은 코가 네 다리를 모두 더한 길이보다 더 긴 모양새를 하고 있다. 뱀처럼 똬리를 튼 듯한 코 모양의 코끼리 조각도 등장한다. 예술 교육과 창의성,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책이다. 작가는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낯선 존재에 공감하는 힘과 상상력의 결과물"이라며 "창조의 세계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결핍도 무거워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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