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징조였던 손바닥 ‘王’자, 구둣발
쿠데타 동경하던 검사의 망상에 계엄
광주 역사와 민주 시민이 나라 살려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징조는 있었다. 역사적 사건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2021년 10월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경선 토론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왼쪽 손바닥엔 왕(王) 자가 새겨져 있었다. 21세기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가 미신을 믿는 듯한 행동을 전 국민 앞에서 버젓이 한다는 건 납득이 안 됐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조선의 왕이 되려 하는 건 아닐지 불길한 예감도 엄습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설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라며 애써 그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나 그때 간파했어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이 왕과 다름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자 괴물이 된 국회로부터 ‘나라’를 지킬 방법이 그에겐 군대와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구둣발도 신호였다. 2022년 2월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무궁화호 열차에서 구두를 신은 채 앞좌석 벨벳 천 위에 발을 뻗는 장면은 암시였다. 국민을 섬겨야 할 이가 다른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마치 짓밟으려 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 군사 독재 시절 폭압에 대한 트라우마가 큰 한국 사회에서 구둣발은 군홧발도 연상시켰다. 그러나 그냥 넘어갔다.
심지어 쿠데타를 동경하는 발언을 한 사실을 간과한 건 가장 아픈 대목이다. 검찰총장이던 2020년 3월 “만일 육사에 갔다면 쿠데타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지난해 10월 고발사주 의혹 재판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를 심각하게 여긴 이는 거의 없었다. 윤 대통령은 결국 4년 후 친위 쿠데타나 다름없는 12·3 불법 계엄을 감행했다.
대부분의 국민에게 12·3 계엄은 느닷없고 시대착오인 데다가 너무 황당해 초현실로 느껴졌다. 그러나 사시 9수 끝에 검사가 돼 평생 갑으로 과거에 갇혀 살던 윤 대통령 입장에선 오래 준비하고 꿈꿔온 일이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거사였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검찰의 역사를 ‘빨갱이 색출의 역사’로 생각하는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되면 ‘광란의 칼춤’을 추는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는 방법은 계엄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상식이 있는 이에겐 터무니없지만 그에겐 북한의 선관위 해킹과 부정 선거 의혹도 하루빨리 밝혀야 할 중대 사안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법적 권한으로 고도의 통치 행위인 계엄을 선포한 것’인데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 이유다.
그나마 윤 대통령의 불법 계엄 선포가 2시간여 만에 국회에서 계엄해제요구안이 가결되며 무위로 끝난 건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재빠르게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을 막아서 가능한 기적이었다. 만약 시민들이 조금만 늦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이는 없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무장 계엄군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건 역사가 무한한 용기를 불어넣어줬기 때문이다. 국회 상공의 군 헬기를 보며 많은 이는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렸다. 당시 전남도청처럼 국회를 외롭게 놔둘 순 없다는 공감대가 컸다. 다시 역사에 부끄러울 수도 없었다.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성공도 큰 힘이 됐다. 국회 현장뿐 아니라 이날 수많은 잠재적 시민군은 언제든 뛰어나갈 준비를 한 채 밤을 새웠다. 결국 그간의 민주화 역사가 절체절명의 순간 나라를 살린 셈이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결정이 날 때까진 상당 기간 불확실성과 혼란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2024년은 앞으로 이 땅에선 그 누구도 쿠데타나 내란을 꿈꿀 수 없게 만든 의미 있는 해로 기록될 것이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 인간 됨됨이도 세심하게 살펴 신중히 뽑아야 한다는 교훈을 새겨야 하는 건 물론이다. 그 누구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순 없다.
관련 이슈태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