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부문 수상작
서보경, '휘말린 날들'
의료인류학자인 서보경(42)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들을 '앞줄에 선 사람'으로 부른다. 그저 감염이라는 '생물사회적 사건'을 한발 앞서 겪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감염은 타자로부터 당하거나 혹은 타자에게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명 형식이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변형하는 과정"이라는 게 서 교수의 말이다. '휘말린 날들'은 그가 "감염을 휘말린 상태로 이해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서 교수는 "앞줄에 선 사람들에게 휘말리면서 직업으로서 인류학자가 됐"다. 그는 2000년대 중반 인류학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HIV/AIDS인권연대나누리+'에서 활동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처음 시작되고, HIV 치료제의 특허권 문제를 야기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 사회적 갈등이 분출하던 때였다. 사회 운동에 관심 많던 그가 HIV/AIDS 인권 운동에 휘말린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휘말린 날들'은 HIV를 학술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의 연구서다. 2015년 유엔에이즈가 제안해 국내 최초로 이뤄진 'HIV 낙인 지표 조사'의 연구 책임자였던 서 교수의 관련 논문을 본 편집자의 제안으로 책을 내게 됐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HIV 관련 담론은 사회학, 인류학, 문화연구 등 모든 분야에서 퀴어 이론, 소수자 정치 이론, 인권에 기반한 보건 이론 등 중요 전기를 만들어 왔다는 그런 확고한 이해를 갖고 책을 썼다"고 했다.
그가 활동가와 연구자의 자리를 넘나든 덕에 '휘말린 날들'은 학술서면서도 대중 교양서의 덕목을 두루 갖췄다. 이를 테면 외국어로 된 학술용어 대신 '휘말리다'라는 문학적인 언어로 감염을 새롭게 개념화했다. '감염되다'가 아닌 '감염하다'라는 중동태 표현을 썼다. 감염을 가해와 피해, 능동과 수동/피동의 구도를 넘어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같은 저자의 노력은 무엇보다 감염이 공동체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감염은 서로 휘말려 일어납니다. 서로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가 겪는 일입니다."
HIV 감염인이라고 모두 에이즈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학적으로 HIV는 만성질환화됐다. 하루 한 알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면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관리 가능한 질병이다. 또한 에이즈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성관계를 맺는 상대가 HIV 감염인이면 감염할 수 있는 병이지 성 정체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HIV에 대한 낙인과 혐오는 여전히 뿌리깊다. "우리는 누구나 정상화의 과정에서 탈락하는 경험을 한 번은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경험을 먼저 한 HIV 감염인들이 앞줄에 서서 뒷줄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거예요. 이들의 특수한 경험이 보편적 지향을 만들어 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저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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