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년 의료봉사 나선 신경외과 전문의
매달 들려오는 환자 고독사 소식에 씁쓸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의 마감 돕고 싶어”
“병원에 여러 번 와서 진료 봤던 사람이 얼마 전 숨진 채로 발견됐어요. 고독사한 거죠. 매달 80~100명의 환자가 병원을 찾는데 달마다 몇 명씩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와요. 이곳에 오는 환자들이 고독사하지 않도록 좀 더 신경 써야 하는데.”
이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소재 요셉의원에서 만난 고영초 원장은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잘 돼 있지만, 의료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도 정말 많다”며 이렇게 말했다. 연말을 맞아 화려하게 꾸민 영등포역 인근 백화점에서 불과 300m 남짓 거리에 있는 요셉의원은 가난한 환자를 무료로 돌보는 진료소다.
5,000여 명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요셉의원은 1987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설립된 후 1997년 이곳 쪽방촌 입구로 자리를 옮겼다. 외과와 내과, 이비인후과, 치과, 피부과 등 14개 진료과가 개설돼 있다. 상주하는 고 원장을 제외하면 130명 남짓의 의사가 자원 봉사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환자의 상당수는 노숙인이다. 쪽방촌에 거주하는 사람과 건강보험료 체납자, 외국인 노동자도 이곳을 찾는다.
고 원장은 “진료를 보고 있으면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원장을 맡으면서 거동이 불편해 병원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방문 진료를 시작했어요. 피 검사를 하고 경우에 따라선 병원으로 데리고 와 X선 촬영도 하는데, 병을 너무 늦게 진단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에 오는 환자들은 술‧담배를 많이 하니까 간암과 위암, 대장암 등에 많이 취약하거든요.”
병을 발견해도 요셉의원에서 할 수 없는 수술이 필요한 경우엔 난감할 때가 많다. 다른 병원에서 환자 받기를 꺼려해서다. “병원비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건강보험료 체납으로 의료보험이 정지된 사람이나 외국인 환자는 다른 병원에서 아예 받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가 병원비 일부를 부담하겠다고 사정해도 쉽지가 않아요. 외국인 환자는 진료의뢰서를 해당 국가 대사관에 보내 후속 조치가 이뤄지도록 하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이어 “국가 지원을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위한 병상이 큰 병원에 확충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반백 년 이상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를 돌보는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고 원장은 “처음부터 의사 되길 희망한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가 의사란 직업을 처음 접한 건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4월 19일이다.
당시 초교 2학년이던 그는 집이 있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서 시위대를 구경하며 용산구 삼각지까지 왔다. “당일 오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자 시위대가 흩어지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상황이 바뀌니까 무서워져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울고 있었는데 한 대학생이 본인 하숙집에서 재워주고 다음 날 집에 데려다줬어요. 서울대 의대 4학년이라고 들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의사란 이런 사람이구나 싶었죠.”
신부가 꿈이었던 고 원장은 신부와 가장 비슷한 직업을 의사라고 생각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1학년이던 1973년부터 봉사 동아리인 가톨릭 학생회에서 봉사활동에 나섰다. 청계천 철거민이 쫓겨난 경기 성남, 서울 은평구 수색‧응암동 등을 다니며 진료를 봤다. 특히 “경기 양평군 서종면으로 갔던 1학년 여름방학 때의 봉사활동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당시는 의료보험이 없었고, 해당 지역은 읍내까지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다니는 외진 곳이었다. “인근 지역 주민이 하루에 500~600명씩 와서 진료를 봤어요. 보람이 엄청났고, 그때부터 봉사활동이 제 소명이라고 생각한 거 같습니다.”
고 원장은 원래 내과 전문의가 될 생각이었다. “의료봉사에선 내과 의사가 큰 역할을 하거든요. 청진기 하나로 환자를 진단하는 게 멋져 보이기도 했고.” 그러다 대학 4학년 신경외과 실습을 마친 직후 아버지가 뺑소니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으면서 신경외과를 택했다. 그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유언 같아서 신경외과 의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고 말했다.
의대를 졸업한 뒤 대학 교수 생활을 하면서도 서울 금천구 소재 전진상의원과 요셉의원, 외국인 무료 진료소인 라파엘 클리닉에서 봉사활동에 나섰다. 이렇게 진료를 본 환자만 3만 명이 넘는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추천포상과 LG의인상, 아산상 의료봉사상 등을 받았다.
건국대 의과대학장을 맡았을 당시 의료봉사를 주제로 한 강의까지 만든 고 원장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나눔의 삶을 실천하기에 가장 좋은 직업이 의사”라며 “생명을 다루는 삶을 선택할 때 남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의대 열풍’과 관련해선 “경제적 여유가 큰 요인이겠지만, 남을 위하는 삶을 고민하는 이들도 많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올해로 72세인 그는 “언젠간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픈 이들이 생을 잘 마감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악성 종양으로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하는 분을 많이 봤어요. 가족‧친구‧주변 사람과 화해하지 못한 채 돌아가는 건 크게 후회되는 일이니까 환자가 남은 시간을 잘 보내도록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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