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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 한 줄기 빛, '모두의 1층' 판결

입력
2025.01.02 22:00
수정
2025.01.03 12:3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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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조희대 대법원장. 대법원 유튜브 생중계 영상 캡처

12월 19일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조희대 대법원장. 대법원 유튜브 생중계 영상 캡처

벨트슈메르츠(Weltschmerz). 독일어 문학 용어로 '세계의 고통(world pain)'을 뜻한다. "무자비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낄 때 밀려드는 고통과 슬픔" 정도로 해석된다. 계엄 후 탄핵으로 격랑의 12월을 보내고 미국 정권 교체기 한국 정치의 리더십 부재와 암울한 경제 상황이 겹쳐지는 가운데 항공 참사까지 난 지금 이 시점. 많은 사람이 느낄 만한 마음의 상태다.

12월의 이 거대한 벨트슈메르츠 속 그나마 한 가닥의 희망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낸 '장애인 당사자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구제소송에서 국가가 장애인 접근성을 14년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으니 소송 제기 원고에게 위자료 1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다. 대부분의 동네 음식점 약국 등엔 턱 때문에 휠체어 접근이 어렵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도록 법을 만들어 놓은 국가의 책임이 인정된 것이다.

휠체어를 타는 딸의 엄마인 나는 이 결과를 보는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당연해 보이는 이 판결이 나오는 데 10년 넘는 기간이 걸렸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를 비롯해 많은 시민단체가 마음과 힘을 합했다. 특히 이 소송 원고대리인인 공익법단체 두루와 함께 경사로를 놓는 환경과 제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 '모두의1층'을 진행했던 내게 이 판결의 의미는 각별했다. 장애인 접근권을 헌법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판결을 통해 우리 아이가 어디든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로소 인정받아서다.

명목상으로는 장애인 접근권이 '권리'라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경사로를 설치할 땐 각종 '편의'에 묵살당한 경우가 수두룩했다.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장애 당사자들이 가장 어이없어했던 대목은 "매장에 못 가면 온라인 쇼핑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편의 중심' 피고 측 주장이었다. 판결문에 있는 오경미 신숙희 대법관의 보충의견은 바로 이 권리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장애인이 물건 구매의 편의를 추가적으로 누릴수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중략) 장애인이 일상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누릴 권리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적 질문을 던진다."

대법원 판결이 났다고 해서 저절로 경사로를 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수십 년간 굳어진 턱이 저절로 없어질 리 만무해서다. 동네 가게 주인의 선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관심 있는 기업, 지자체, 건물주-점주 등의 시민 참여가 두루 필요하다. 2024년 무의-두루와 브라이트 건축사사무소가 서울시와 함께한 '모두의1층X서울' 경사로 확산 프로젝트에 KB증권과 3개 프랜차이즈 본사가 참여한 것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전국 경사로 사업을 소개하는 모두의1층.org 홈페이지 캡처

전국 경사로 사업을 소개하는 모두의1층.org 홈페이지 캡처

판결 전 무의는 '모두의 1층'을 지지하는 2,000명의 시민을 모았다. 서명한 이들 중에는 비장애인이 훨씬 더 많았다. 이유도 다양했다. "허약해진 부모님을 모시고 휠체어로 외출하려니 힘듭니다." "우리 조카가 알바하는 환경이 경사로 덕분에 더 나아지길 바라요." 이 판결이 많은 이동약자에게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시민들이 보여준 연대의식 때문이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희망이 2025년에 더 확산하기를 바란다. '세계의 고통'은 그런 희망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홍윤희 장애인이동권증진 콘텐츠제작 사단법인 '무의'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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