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945년 초 일본은 미군에 밀려 필리핀을 내주고 도쿄 공습까지 당하며 패색이 짙어졌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오히려 옥쇄 작전을 추진한다. 옥쇄란 원래 아름다운 옥처럼 부서지듯 대의 명분을 위해 끝까지 싸운다는 뜻이지만 일본의 옥쇄 작전은 사실상 일왕과 대본영을 지키기 위해 전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항공기 조종사가 폭탄을 가득 실은 채 연합군 함선과 충돌하는 자폭 공격 ‘가미카제’도 이런 배경에서 감행됐다.
□ 윤석열 대통령이 한남동 관저 앞에 모인 지지층에 친필 서명이 담긴 편지를 보낸 건 옥쇄 작전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그는 “실시간 생중계 유튜브를 통해 여러분께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며 “정말 고맙다”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극우 유튜브에 빠져 부정선거 음모가 있다며 불법 계엄을 선포하고 선관위를 점령했던 그가 아직도 유튜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건 개탄스럽다. 그는 편지에 “주권침탈세력과 반국가세력의 준동으로 대한민국이 위험하다”며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도 밝혔다.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이 임박한 가운데 나온 이 편지는 한마디로 시위대가 막아 달라는 선동에 가깝다.
□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지하철 녹사평역까지 이태원로 양쪽에 마치 대통령실을 성벽처럼 에워싼 화환도 이러한 의지를 보여준다. 지난달 중순 군사 작전처럼 순식간에 세워진 3,000개 안팎의 화환은 공장에서 찍어낸 듯 ‘대통령님 힘내세요’, ‘대통령을 지키자’ 등 똑같은 문구와 인쇄체로 돼 있다.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방증이다.
□ 2차 세계대전 당시 옥쇄 작전을 편 도조 히데키 등 일본군 수뇌부는 목숨을 바치는 군인을 미화하다 결국 국민 피해만 더 키우고 전범 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윤 대통령이 옥쇄를 꿈꾸며 지지자들에게 결사 항전을 부추기는 건 나라를 두 동강 내고 최악의 불상사를 초래하는 위험한 처사다. 지지층만 보고 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지층을 사지로 몰면서 이를 인간방패 삼아 자신만 살겠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그만 항복하고 영장을 받는 게 그나마 지지층을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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