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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정지에 빛바랜 '최장수' 총리... 한덕수가 지키려던 가치는

입력
2025.01.05 12:00
수정
2025.01.0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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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공직생활의 마지막 장은 '탄핵 직무정지'
헌법재판관 임명 유보 결정, "무책임" 비판 많아
합의 강조 韓?... 헌재 무결성에 '흠결' 우려한 듯
'尹 호위부대' 전락 與 최근 행보... 요원한 기대
국정 안정 약속했지만 돌아온 더 큰 '국정 불안정'

편집자주

여의'도'와 용'산'의 '공'복들이 '원'래 이래? 한국 정치의 중심인 국회와 대통령실에서 벌어지는 주요 이슈의 뒷얘기를 쉽게 풀어드립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27일 오후 국회 탄핵소추의결서를 송달받은 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를 나서고 있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뉴시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27일 오후 국회 탄핵소추의결서를 송달받은 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를 나서고 있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뉴시스

지난 3일은 한덕수 국무총리의 오랜 공직생활 중에서도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한 총리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재임기간이 가장 긴, '최장수 총리'의 반열에 오르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2년 5월 21일 윤석열 정부 초대 총리로 부임해 이날 임기 '959일'을 맞았는데, 이는 문재인 정부의 이낙연 전 총리가 보유한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958일)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물론 한 총리의 장수 배경엔 현 정부 들어 극한의 여야 갈등이 심화되며 '야당의 임명 인준을 받을 만한' 마땅한 대체 총리 후보군을 찾기 어려웠던 정국 상황이 있습니다. 다만 한 총리 본인이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사실상 '대체불가' 수준의 폭넓고 꼼꼼한 일처리 능력과 안정적 국정 운영에 대한 소신으로 정부 내에서는 압도적인 신뢰를 받아온 인물이라는 점도 배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운'만 가지고 최장기간 국무총리직을 유지한 건 아니니, 한 총리에게도 영예로운 기록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사뭇 씁쓸한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며 정부서울청사를 떠난 한 총리는 '직무정지' 상태로 임기의 959번째 날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전격 발탁한 윤석열 대통령은 '내란 수괴(우두머리)' 혐의로 발부된 체포영장에 쫓겨 관저 안에 꽁꽁 숨은 신세가 됐습니다.

무도한 불법계엄을 자행한 윤 대통령에게 '탄핵안 가결'은 피하기 어려운 운명이었겠지만, 그 뒤를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한 총리는 상황이 분명히 달랐습니다. 결정적으로 한 총리 본인이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에서 유보적 태도를 취하며 사실상 '탄핵을 자초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긴 공직생활의 마지막 페이지에 '오점'으로 남을 수 있는 선택으로 이끈 신념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韓, 탄핵 가능성 알고도... 무책임한 결정인가?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해 6월 12일 국회를 방문해 우원식 국회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부르튼 입술이 눈에 띈다. 고영권 기자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해 6월 12일 국회를 방문해 우원식 국회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부르튼 입술이 눈에 띈다. 고영권 기자

한 총리는 관가에서는 '전설적 인물'로 통합니다. 관세청과 산업부를 거쳐 김대중 정부 시절 경제수석비서관과 국무조정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 전신) 장관을 지냈습니다. 주미대사도 지냈지요. 노무현 정부 때 국무총리 자리까지 올랐는데, 이번 정부 들어 또 총리로 발탁됐습니다. 대체자를 찾기 어려워 이대로 윤석열 정부 5년을 함께하는 '오(五)덕수'가 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는가 싶더니, 윤 대통령이 '12·3 불법계엄' 여파로 직무정지되면서 일거에 '대통령 권한대행'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는 2주도 가지 못하고 좌초했습니다. 한 총리가 국회에서 선출한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정계선·조한창·마은혁)의 임명을 사실상 거부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즉각 탄핵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은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가 들어선 직후부터 '탄핵 속도전'과 향후 집권을 염두에 둔 '국정 안정' 사이에서 전략적 저울질을 해왔지만,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만큼은 가차 없었습니다. 이 상태로 마냥 놔뒀다가는 윤 대통령의 탄핵 인용 자체가 불투명해질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한 총리도 헌법재판관 임명을 미루면 탄핵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국민 담화를 통해 "여야가 합의해 안을 제출할 때까지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이튿날 직무정지를 자초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습니다.

한 총리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일단 한 총리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권한대행은 안정적 국정 운영에 전념하되,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게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인데, 여야의 정치적 합의 없는 상황에서 권한대행이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건 헌정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 쉽게 정리하면 '권한대행은 여야 합의 없이 중대한 결단을 내릴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니 국회에서 합의 먼저 하라'는 말입니다.

권성동 국민의힘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탄핵 표결에 항의하며 규탄대회를 하고 있다. 뉴스1

권성동 국민의힘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탄핵 표결에 항의하며 규탄대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요즘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의 시대에 '합의'의 가치는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라겠죠. 하지만 동시에 '공자님 말씀'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탄핵 정국에서 국민의힘은 과거 탄핵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대통령 결사호위'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만장일치'로만 탄핵 인용이 가능한 '헌재 6인 체제'를 필사적으로 지키는 건 전략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반대로 민주당 입장에서 이 같은 여권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방탄 전략'일 뿐입니다. 즉, 애당초 양자 합의가 가능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한 총리가 키를 쥐고 있음에도, 정치적 책임과 보수 진영의 반발을 피하려 '무책임한 결정'을 했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입니다.


'헌재 무결성' 우려 가능성... 결말은 국정 불안정

한 총리도 결정을 앞두고 많은 고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총리는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가 정국의 최대 뇌관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자신의 일방적 결단이 자칫하면 '민주주의 최후 보루'인 헌법재판소, 나아가 헌재 결정의 무결성에 '흠'을 남길 수 있다는 우려를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여당이 "헌법재판관 임명은 권한대행의 권한이 아니다"라며 길길이 뛰고 있는 와중에 한 총리가 임명을 강행하면, 추후 여당이 헌재 구성의 합헌성을 비롯해 단계 단계 시비를 걸고 늘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종국에 헌재의 어떤 결정이 나오든 국민의힘과 지지층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심각 수준인 정치적 양극화가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단계로까지 악화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여야의 '정치적 합의'를 마지막까지 강조한 건 발언 그대로 '헌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선의로 해석할 때 그렇습니다.

한 정부 관계자는 "한 총리가 '여야 합의'를 강조한 게 사실은 여당을 압박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다만 전쟁 같은 탄핵 정국이 한창인 상황에서 비상계엄 사태 이후 사실상 '윤석열 호위부대'로 전락해버린 듯한 국민의힘의 지난 한 달간 행보를 감안하면 한 총리의 기대처럼 상황이 '올바르게' 흘러갔을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입니다. 대통령의 권한을 승계하며 '국정의 조속한 안정화'를 약속한 한 총리지만, 그의 과도한 신중함으로 인해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대행' 체제를 맞는 사상 초유의 상황으로 흘러갔습니다. 한 총리가 스스로의 선택을 뼈아프게 되새겨봐야 하는 대목입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전광훈TV 유튜브 캡처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전광훈TV 유튜브 캡처

한 총리 뒤를 이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헌법재판관 2명을 임명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3명 완전체는 아니지만, 정말 오로지 '국정 안정'만 생각했다는 듯 한 총리와 달리 길게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여야가 즉각 반발했고 정부 내에서도 크고 작은 파열음이 계속되고 있지만, 헌법재판관 임명은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인 만큼 이젠 정국의 '뉴노멀'로 점차 받아들여져 안정되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여권이 향후 헌재 판결의 무결성을 공격하고 나설 가능성은 남아있기는 하나 과연 민심이 얼마나 동조할지 의문입니다.

탄핵 정국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한창입니다. 그 역사적인 과정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고 기나긴 공직 생활의 마지막 장을 끝내 직무정지로 허무하게 장식한 한 총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나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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